짧은 성찰

사람을 추출해선 안 된다

by 백오


'사람을 헤쳐선 안 된다’ -그러나 동물을 해치는 것은 된다 -사람에게 도덕, 어떤 도덕적 감정, ‘조금이라도 사람을 해치는 것은 아주 몹쓸 짓’이라는 충동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인간종을 다른 동물로부터 떼어내서 신격화하는 짓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도덕성은 신성이다. 동물을 죽여도 되면 사람도 죽여도 되고, 동물을 먹어도 되면 사람도 먹어도 된다. 자연 안에 그것을 부정하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이 무리동물인 이유로 사람 간에 본능적인 질서가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하얀 백조들 사이에서 검은 백조가 공격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서열이 높은 늑대가 낮은 늑대에게 해를 가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높은 인간이 낮은 인간을 폭행하는 것이 어떻게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인가? 학교폭력이나 패륜이 인간의 어떤 ‘본성’을 해치는가? 폭력성도 인간의 본성이며, 도덕성도 인간의 본성이다. 오로지 그 점에서만 폭력성과 도덕성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며, 도덕성은 폭력성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오로지 그것만이 도덕의 ‘실재적인’ 근거이다. 사람에게 인륜이란 없다. 범죄자의 살인 행위에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과민반응할 근거는 없다. 본인보다 ‘열등한’ 누군가를 격하시키는 버릇은 누구에게나 있고, 몇몇 이들에게는 그 버릇이 더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될 뿐이다. 과도함이 문제이지 유무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을 향한 관념의 지배 속에서 자주 망각되는 사실이다. 머릿속을 사는 이들 -도파민에 취약한 두뇌를 가진 이들은 도덕적 이상향에 빠져 사람을 천사 혹은 신으로 인식한다. 이 인식이 발전한 후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진정한 사람’, 곧 ‘신으로서의 사람’과 ‘불온한 사람’, 곧 ‘신성과 동떨어진 범죄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들이다. 이것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론적 차이, ‘종적 차이’이다.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 그러나 부도덕한 이들 -범죄를 저질렀거나, 나와 다른 정치 사상, 혹은 종교에 매몰된 이들은 죽이거나 기본권을 박탈해도 된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정한 사상에 심취한 정치가들이 ‘우리는 대중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 행해졌던 힐러리 클린턴의 연설이 대표적이다. 한국에도 그런 정치가가 있으나 직접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본인의 도덕적 결함을 감춤으로써 스스로를 이상화한다. 그리고는 타인의 본능적인,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불의를 바라보며 ‘너는 어째서 나와 같은 이상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는가?’, ‘너는 어째서 나와 같은 도덕성에 도달하지 못했는가?’하는 의문을 놓는다. 그런 의문 자체가 하나의 불의 –‘남을 찍어누름으로써 본인은 높은 서열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라는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 말이다 -사실 높은 서열에 오르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결여된 사람이다. 도덕 교육은 의식만을 거세할 뿐이다. 무의식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본능을 지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타인을 무시하려는 감정, 격하하려는 감정은 분노나 기쁨과 같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 중의 하나다.



무시하거나 공격하고, 앙심을 품거나 복수하고, 연민을 느끼거나 보호하는 모든 일들이 ‘인간적 행동’의 스펙트럼 안에 있다. 배합 비율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인물 혹은 집단을 타자화하는 것마저도 본능의 일환일 뿐이다. 그런데도 ‘실제로 이상적인 이들이 있다’, ‘실제로 신성에 근접한 이들이 있다’는 둥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의 관념에 단단히 매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남에게 쥐어진 것과 동일한 칼이 나의 손에도 쥐어져 있고, 남에게 쥐어진 것과 동일한 반창고가 나의 손에도 쥐어져 있다. 남이 나를 칼로 벤다면 나도 남을 칼로 벨 것이고, 남이 나에게 반창고를 붙여준다면 나도 남에게 반창고를 붙여줄 것이다 -이것 이상의 태도를 인간에게 기대할 수 없다. 사람과 개에게는 큰 차이가 없다. 개에게도 폭력성과 도덕성이 있다. 다만 사람에 비해 더 투명하고 덜 음침할 뿐이다. 증오와 폭력성의 적절한 표출은 사랑과 연민의 적절한 표출과 마찬가지로 무리동물, 서열동물에게 필수적이다. 인간의 본능 중 어느 한 부분만이 임의로 추출되어선 안 된다.



내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왜 이리도 길고 반복적인 글을 쓴 것인가? 이 글을 통해 나는 어느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 -교회를 안 나간지 15년 가량이 흘렀음에도, 나는 아직도 종교인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죽을 때까지 종교인일 것이다. 종교인으로서의 성질이 단 1%만 남아있을더라도, 나는 결코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이다 -사람이 하는 행동의 원천을 사람 밖에서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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