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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육진심 Apr 18. 2024

맞고 자란 아이는 커서 어떤 부모가 될까?

아이와의 '나쁜 관계(베드 핏)'에 대해 영화 ‘세 자매’가 답하다.

희숙, 미연, 미옥은 자매입니다.      



세 자매는 어린 시절 끔찍한 학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막내 술에 취한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자 희옥은 내복 차림으로 미옥을 데리고 나옵니다. 동네 슈퍼에 있는 아저씨들에게 신고를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오히려 혼만 나죠.


다시 집에 오니 만신창이가 된 막내 동생을 미연이 안고 있습니다.

알아볼 수도 없는 얼굴을 한 상태로 말이죠.     


아동복지법에 따르면 아동학대란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이 아동의 건강 또는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ㆍ정신적ㆍ성적 폭력이나 가혹 행위를 하는 것과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을 유기하거나 방임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학대의 범주를 보통 ‘신체, 언어, 정서 등’으로 구분하는데요.

학대에 해당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광범위해서 조금 쉽게 설명드릴게요.     

 

신체적 학대는 아이의 몸에 고통을 주는 행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억지로 아이의 팔을 잡고 끌고 가는 행위도 아이가 신체에 통증을 느끼므로 학대가 될 수 있죠.


언어적 학대는 아이가 들었을 때 심리적 고통을 유발하는 말들을 모두 포함하는데요.

욕설부터 “왜 그렇게 뚱뚱하냐. 잘하는 게 뭐냐.”와 같이 비난이나 조롱, 무시, 협박 등 아이에게 불안과 두려움, 슬픔과 죄책감 등을 유발하는 말들이 해당됩니다.


정서적 학대는 명확하게 구분하기 가장 어려운 항목인데, 아이가 부정적인 정서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다른 사람 앞에서 아이 흉을 봐서 아이로 하여금 수치심을 느끼게 하거나, 아이가 말을 걸어도 계속 무시해서 불안하게 만들거나, 어린아이를 집에 혼자 놔둬서 공포스럽게 하는 등 아이가 감당하지 못할 나쁜 감정들을 경험하게 하면 정서적 학대라고 볼 수 있죠.      


어릴 적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는 커서 어떤 부모가 될까요?


세 자매는 모든 범주의 학대를 다 받고 자랍니다.


과연 이들은 어떤 부모가 되었을까요?     


첫째 희숙은 암에 걸린 사실을 숨긴 채 딸과 둘이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돈이 필요할 때만 찾아오죠. 남편이 자신을 함부로 대해서인지 딸도 엄마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죠.      


둘째 미연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편입니다. 꽤나 독실한 신자인 그녀는 성가대 지휘자까지 맡고 있죠. 얼마 전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턴 더 열심히 기도 중입니다. 오직 신 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셋째 미옥은 작가인데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합니다. 아들이 있는 남자와 결혼했는데 도대체 엄마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2017년에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실시한 '가정폭력과 아동학대'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아동기에 가정폭력을 경험한 남성과 여성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신의 자녀를 더 많이 학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학대를 경험했으면서도 자신의 아이가 당하는 폭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민감하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왜냐면 이들에게 폭력은 일상의 일부였기에, 학대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죠.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믿는 부모에게 받은 학대는 아무리 지우려 해도 탈각되지 않습니다.
문신처럼 몸과 마음에 새겨져 비슷한 상황이나 분위기만 돼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니까요.   

   

미연은 기도를 하지 않는 아이에게 마음에 사탄이 들었냐고 쏘아붙입니다.

희숙은 가출하려고 돈을 달라는 딸에게 웃으며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죠.

미옥은 의붓아들에게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죠. 그녀는 엄마의 역할이 뭔지 모릅니다.   

   


정말 학대를 받고 자라면,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걸까요?     


세 자매는 아버지의 생일을 맞이해서 집으로 갑니다.

아버지에게 대드는 막냇동생으로 인해 억눌렸던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미연은 아버지에게 외칩니다.      


아버지 사과하세요. 우리한테. 사과하시라고요.
아버지 제가요 제가 아홉 살 때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내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우리 아버지만 빼고, 우리 가족 모두 죽어있게 해 주세요.
제발. 아버지 빼고 다 천국 가서 행복하게 살게 해 주세요.    
  

이전에 모성과 관련된 내용을 다룰 때, 부모나 자신을 키워준 양육자에게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면,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는 유전자가 활성화되지 않아, 건강한 모성을 발휘하기가 어렵다고 말씀드렸죠.  

    

학대를 받고 자라면 당연히 자신의 아이를 돌보고 사랑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고 배운 방식으로 아이를 키운다면, 아이 역시 같은 상처를 입게 되겠죠.      



그렇다면, 어릴 적 학대받고 자란 사람들은 어떤 점이 다를까요?     


이들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자주 빠집니다.

누군가 귓속말만 해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고, 작은 실수에도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죠.

내가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치를 자주 봅니다.

상대가 조금만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면 바로 수긍하고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피해의식이 있는 건 같은데 그걸 공격적으로 드러내는 유형인데요.

이런 사람들은 일부러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찾아 억압하고 조종하면서 무시당하지 않으려 합니다.

성격이 급변하고 눈치 없이 다른 사람을 창피주며 예의 없게 행동하기도 하죠.   

   

부모에게 학대를 경험한 이들은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나(자기)’에 대한 적절한 인식이 없습니다. 즉,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나에게 어떤 모습이 필요한지 알지 못하는 겁니다.      


신체적 학대를 심하게 받지 않았더라도, 정서적 학대를 당한 경우, 부모에게 ‘이중 메시지’를 받으며 자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중 메시지’란 ‘사랑해/싫어, 네가 좋아/너 때문에 힘들어.’와 같이 상반되는 메시지를 동시에 줌으로써, 부모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이를 통제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빠가 저녁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겠다는 아이에게 “그래. 네가 가고 싶으면 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준비를 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아빠의 기분이 영 좋아 보이지 않죠.

아이는 아빠의 눈치를 살피다 그냥 안 나가기로 합니다. 그랬더니 아빠가 이렇게 말하죠.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잖아. 왜 안 나가?”

도대체 나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아이는 아빠의 진짜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아빠는 아이가 늦은 시간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게 탐탁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들을 존중하는 아버지로 보이고 싶어 가고 싶으면 가라고 말하죠.

그런데 그 말속엔 가지 말라는 다른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아이는 감춰진 메시지를 알아차리고 나가지 않으려 하지만, 과연 그게 맞는지는 알 수 없죠.

아빠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면요.      


이렇게 자란 사람은 끊임없이 상대의 진심을 알아내느라 심리적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신이 경험한 대로 아이를 대하게 되죠.


친구를 때리고 물건을 뺏는 아이 때문에 부끄럽고 속이 상해 아이 옆에만 가면 몸이 경직되면서도, 억지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잘할 수 있다고 응원하는 것처럼요.      


이렇게 ‘이중 메시지’를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나사가 빠진 것처럼 정서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기능이 오작동을 일으킵니다.

나의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도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하죠.


그러나 다행히 뇌는 계속해서 발달하고 변화합니다.      


부모가 되어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신경계의 기능과 구조가 변화한다는 ‘신경가소성 현상’은 학대받은 부모에게 희망을 주는데요.


다시 말해, 성장하면서 좋은 친구나 선생님, 친척, 배우자 등을 통해 건강한 관계 속에서 애착을 형성하면, ‘나도 사랑받을만한 존재구나. 내가 잘못돼서 학대받은 게 아니었구나.’라며 자신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감각이 생겨나면서 뇌의 구조도 바뀌게 됩니다.      


‘학대받은 사람의 모드’에서 ‘사랑받는 사람의 모드’로 전환되는 거죠.      


비록 흔적은 남겠지만 상처들이 아물어가면서 아이와의 건강한 관계를 위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한 부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따뜻한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데 우리 애는 그거에 비하면 진짜 행복한 건데. 애는 그걸 몰라요. 어떤 땐 나는 받지도 못한 걸 왜 이렇게 주기만 해야 하는지 억울한 생각까지 들어요.”     


그렇죠. 나조차도 마음이 궁핍한데 아이에게 계속 주다 보면 ‘심리적 허기’가 느껴질 겁니다.


나도 채움을 받고 싶고 그래야 공평한데, 아이를 키우는 일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부모에게만 사랑과 희생을 내놓으라며 독촉장을 들이대니까요.      


그런데 이럴 땐 그냥 투자라고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지금 아이에게 주는 애정과 관심, 이해와 격려가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는 거죠.   

   

나는 학대받은 아이가 어떤 삶을 사는지 잘 알고 있으니, 아이가 그렇게 자란다면 내 마음도 편하진 않을 겁니다. 학대받은 아이가 부모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떠올려보세요.   

   

아마 미래의 나를 위한 일이라 여기면, 억울한 마음이 조금 가실지도 모르겠네요.      



어린 시절 학대를 받지 않아도 아이와 나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학대를 받지 않은 부모들도 아이와 ‘베드 핏(잘 맞지 않는 관계)’을 맺는 경우가 많은데요.      

혹시 라디오 주파수 맞춰보셨나요?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지지직 잡음만 들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죠.


부모와 아이 사이에 나쁜 관계인 ‘베드 핏(BAD FIT)’은 바로 이런 겁니다.

부모와 아이가 서로에게 맞추지 못해 상대의 생각과 감정이 들리지 않고 잡음만 들리는 거죠.

부모는 아이가 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합니다.      


부모와 아이도 매번 주파수를 정확하게 맞춘 순 없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잘 읽을 때도 있지만, 상황과 기분에 따라 혼선되거나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정확한 주파수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다 보면, 서로에게 맞추는 방법을 잊게 되고, 조율이 안 되니 계속해서 잡음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부모와 아이 사이 '베드핏(나쁜 관계)'의 징조들


만약 다음과 같은 징조들이 보인다면, 나와 아이는 주파수를 잘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혹시 나의 어릴 적 상처로 인해, 아이와 '베드 핏'을 맺고 있진 않나요?

                             



영화에서 딸과의 사이가 어긋나 버린 희숙도,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미연도, 의붓아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해 불안해하는 미옥도, 모두 자신의 사랑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한 '충분한 사랑'은 얼만큼일까요?     


만약 내가 100킬로가 소요되는 거리를 간다고 가정해 보세요. 자동차에 기름이 얼마큼 있으면 충분할까요?

반드시 기름을 가득 채우지 않아도 됩니다. 150킬로만 갈 수 있는 기름만 있어도 충분하니까요.     


아이마다 필요한 기름의 양은 다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부모가 가득 기름을 채우지 않아도 건강하게 잘 키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잘 키운다는 의미는 아이가 모든 면에서 우수하고 부모의 말에 순종한다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알고 건강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도전하고 노력하는 아이를 뜻하는 겁니다.      


즉, 나에게 기름이 가득 차 있지 않아도 내 아이에게 필요한 걸 줄 수 있으면, 사랑은 충분한 겁니다.

굳이 100킬로를 가는데 기름을 완전히 채울 필요가 없듯이요.      


영화에선 엄마로서 세 자매의 단점이 부각됩니다.

아이가 잘못된 선택을 해도 용인하는 비겁한 모습이나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엄하게 혼내는 모습, 부모의 권위를 상실하고 아이처럼 자녀에게 기대는 모습 등 부모로서 충분하지 않은 사랑을 가진 것만 같죠.      


하지만 세 자매에겐 그런 점만 있을까요?     


이들에겐 가출한 딸이 잘못될까 봐 거리를 헤매고,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아이에게 쏟은 걸 미안해하며 눈물을 흘리고, 엄마다운 엄마가 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자신을 점검하는 모습도 존재합니다.      


이렇듯 중요한 건 '균형'입니다.


어떤 날은 기름이 부족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충분하기도 하죠.

충분할 땐 더 많이 사랑하고 모자를 땐 가진 것 내에서 아이에게 마음을 표현하면 됩니다.      


충분한 사랑을 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균형이 맞아야,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겁니다.      


어린 시절 학대를 받고 자랐다고 해도,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닙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되살아나 아이에게 아픔을 준 날엔,

“아빠가 힘이 들어서, 마음이 상해서, 기분이 좋지 않아서, 너에게 짜증을 내고 네가 속상해할 말을 했어. 미안해.”라고 솔직하게 나의 감정과 상태를 이야기해 주세요.      


그날은 그렇게 마무리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일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죠.      



부모가 묻습니다.      


학대받고 자란 부모는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요?     



영화 ‘세 자매’가 답합니다.      


학대받은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문신처럼 몸과 마음에 새겨지죠.
불쑥 튀어나오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선,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방법부터 찾으세요.      

내가 회복되면, 아이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덧나지 않게 치료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요.

나의 고통부터 먼저 바라봐야, 아이의 고통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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