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에세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은 히가시노 게이고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을 시작으로 11 문자 살인사건, 가면 산장 살인사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등 그의 많은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뿐 아니라 에세이 역시 꽤 많이 출판했다. 팬으로서 작가의 일상생활과 그 생활 속에 담긴 그의 생각을 엿보는 것은 또 하나의 큰 재미와 기쁨을 준다. 작가와 대화하는듯한, 조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그의 에세이 “사이언스?”를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기공학 출신의 소설가이다. 나 역시 전기 공학을 졸업하고 글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그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어쩌면 공통점이 있기에 더욱 호감이 가고 좋아하는 작가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사이언스?”를 통해 히가시노의 생각과 내 생각을 비교해가는 과정 속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번에 읽을 책을 몰색하던 중, 히가시노와의 공통점을 또 하나 발견했다. 그건 바로 “스노보드”이다. 스노보드를 주제로 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에세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무한 도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마흔이 되는 히가시노 게이고에겐 “스노보드”는 기회가 있으면 해보고 싶은 종목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있어서인지, 마음은 “꼭 해보고 싶다”에서 “꼭 해보고 싶었는데”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술집(?)에서 우연히 <스노보더> 잡지의 편집장과 말할 기회를 얻은 히가시노 게이고. 그는 편집장에게 자신을 꼭 스키장에 데려가 달라는 부탁을 한다.
— P 18 ~ 19 내용
이게 나에게는 마지막 찬스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돌연 머릿속을 스쳤던 것이다. 그래서 편집장 M씨에게 나도 꼭 스노보드에 도전해보고 싶다,라고 말해보았다. M씨는 얼큰하게 취해 있었지만 나의 희망사항에 대해 “뭐, 그러시다면 다음에 한번 같이 가시죠”라고 가볍게 응해주었다.
너무도 쉽게 일이 정해지는 바람에 도리어 불안해졌다. 술자리에서 오고 간 얘기,라고 나중에 발을 빼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짐을 받기로 했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에요. 진짜라고요. 술 취한 김에 해본 소리가 아니에요. 꼭 불러줘야 합니다? 이 일을 적당히 넘겼다가는 가만 안 둡니다?” 반쯤 협박이었다. 그만큼 나는 필사적이었다. 눈빛이 트릿해져 있던 M씨도 점점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네, 알겠습니다. 저도 진심이에요. 그 증거로 새 보드를 히가시노 씨에게 선물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이렇게 편집장 M씨의 만남을 계기로 히가시노의 스노보드 도전 여정이 시작된다.
혼자서 또는 M씨의 제자 T여사, S편집장과 함께, 때로는 스키에 관심 있는 작가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 이상씩, 5~6월에도 실내 스키장에서, 정말 열정적으로 스노보드를 배우고 즐긴다.
어느덧 스노보드를 꽤 잘 타는 히가시노 게이고. 그 다양한 경험과 그 경험 속에서 히가시노의 생각들.. 그리고 스노보드를 즐기며 생각해낸 단편 소설 3편을 엮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무한도전” 책을 출판한다.
1. 열정과 추진력, 그리고 지인
책을 읽는 내내, 히가시노의 열정과 추진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다음에 밥 한번 먹자.”와 같은 “다음에 ~ 하자.”라는 말을 참 자주 듣기도 하고, 또 쓰기도 한다. 이는 확실히 정해 놓은 것이 아닌 애매한 면이 있어서 보통 흐지부지 될 때가 많다. 하지만 히가시노는 “다음에 한번 같이 가시죠”라는 말에 확실하고 구체적인 날짜를 잡는다. 그리고 실행한다. 그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일상을 스노보드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가고, 지인들과 약속을 잡고 스노보드 여행을 떠난다. 그의 스노보드를 향한 열정과 추진력은 참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지인과 어떤 일을 추진할 때, “다음에~”라는 말을 최대한 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날짜와 명확한 계획을 제시할 때 정말로 내가 추진하고자 하는 약속을 진행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다.
한편으로는, 히가시노만큼이나 열정을 가진, 그와 동행할 “지인(동행자)”이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본문 중에선 몰래 스노보드 연습을 하고 온 히가시노에 대한 동행자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웃으며 너그럽게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의 어른스럽지 못한 감정 폭발에 눈알만 데굴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흔 넘은 사람이 자기 몰래 연습 좀 했다고 그렇게 억울해하다니, 이럴 수가 있나. 하지만 그도 그만큼 스노보드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지간히 억울했던 것이리라. S편집장은 즉각 T여사에게 제2회 스노보드 투어를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 P 31 내용 -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에서 조력 집단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챕터가 있었다. 공동의 가치, 목표, 관심사를 가진 조력 집단.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끌어 주는, 때로는 함께함으로써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조력 집단. 히가시노에게는 그러한 조력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 부러웠던 것 같다. 책을 읽을 땐 잘 공감되지는 못했었는데, 왜 조력 집단이 중요한지 히가시노를 보면서 새삼스레 느끼게 되었다. 나 역시 든든한 조력 집단이 언제나 함께하길, 또 누군가에게 소중한 조력 집단이 되길 바래본다.
2. 일과 취미의 균형, 시간의 소중함.
책을 읽다 보면 내내 이런 생각이 든다. “아니.. 일은 도대체 언제 해??”
스노보드를 정말 정말, 말도 안 되게 자주 타는 모습이 보인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틈만 나면..! 정말 일은 언제 하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렇게 자주 스노 보드를 탄다는 말이 자신의 일을 게을리했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취미를 즐기는 와중에도 히가시노는 1년에 3권 정도의 출판이라는 자신의 페이스를 절대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히가시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대체 일은 언제 했느냐고 다들 의아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 모른다.” - P 102 내용 -
히가시노는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답에 대한 힌트는 책 초반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나중에 다른 출판사 편집자가, 그렇게 바쁘다더니 언제 시간이 나서 장편소설을 쓰셨느냐고 의아해했지만, 실은 그런 맛있는 당근이 나를 수없이 채찍질했던 것이다.” - P 20 내용 -
스노보드를 타기 위해서, 히가시노는 스키장에 가지 않는 날이면 정말 열심히 일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일매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며 사는 부러운 인생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시간 속에서 히가시노는 자신을 수없이 채찍질하며 얼마나 열심히 일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선 낭비되는 시간이 극히 적을 것이다. 히가시노에게서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는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느끼는 저자는, 일과 취미의 균형이 정말 잘 잡혀 있는 부지런한 사람이고 시간의 소중함 또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배울 점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3. 작가로서의 삶
책은 에세이지만 3편의 단편 소설도 실려 있으며, 모두 스노보드와 관련된 단편 소설이다.
3편 모두 재미있게 읽었는데, 읽으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조금 엿볼 수 있었던 것 같다. 3편 모두 스키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해 만든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키장을 다니며 자주 마주쳤던 빨간 스키복의 여성을 보고, 20살의 차이는 날 것 같은 불륜 느낌의 남녀가 스키장에 와 있는 장면을 보고 상상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보았는지 단순한 상상력인지는 모르지만, 취미를 즐기는 순간에도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작가의 세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생활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나의 관심사와 취미 모든 것이 소설의 주제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고 신기했었다.
나는 소설에도 도전해보고 싶은 작은 꿈이 있다. 히가시노처럼,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꾸준히 기록하다 보면 많은 아이디어가 샘솟지 않을까.. 오늘따라 소설가의 길이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