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딱 반걸음

-숙의의학 소설-

by 강용원



ㅂㅇ 정확한 나이를 나는 여태도 모른다. 그런 채 서로 알고 지낸 지 60년이 넘은 벗이다. 그런 그가 정색하고 자기 이야길 하겠다며 찾아온 것은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단골인 동네 밥집에 마주앉았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시간에 등 돌리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밥집은 뒷정리마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괜찮다는 주인의 고갯짓에 기대어 한 시간쯤 더 앉아 있었다. 가장 행복한 술자리는 뒷부분 기억이 슬쩍 자리를 뜨는 것인데, 딱 그렇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자리 뜬 기억 속에 더 많은 곡절이 들어 있기도 하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이랬다.


“부끄러운 일인데, 6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 인생에 종자種子신뢰가 생겼어.”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의 지난 60여 년 삶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로는 그 종자신뢰라는 말이 지닌 진실에 육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흐음, 종자신뢰.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내맡김이군. 진실의 문은 양쪽에 있다는 깨침에서 온 게지. 내가 늘 말했던 비대칭의 대칭에 통짜로 스며들었어.”


누군들 이름 없이 덧없이 살다 죽기를 바라겠는가. 각자 자기 자신의 스타로 떠서 한 생을 노닐다 가는데 기왕이면 ‘대박 나기’를 꿈꾸지 않는 이 그 누구랴. 그의 입에서 인욕忍辱, 아니 진욕進辱의 언어가 흘러나온다.

“대박은 포르노고. 쪽박에서 딱 반걸음 떨어진 삶이 인간답다 싶어.”


그의 삶은 60년 동안 6번 꺾였다. 어머니 자궁에서 1번째 꺾였다. 어머니가 명백한 살해 의지를 지니고 낙태를 도모했다. 0살에 2번째 꺾였다. 어머니에게서 젖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10살에 3번째 꺾였다. 신데렐라 계모와 맞닥뜨렸다. 24살에 4번째 꺾였다. 법학도의 길을 포기했다. 38살에 5번째 꺾였다. 신학도의 길을 포기했다. 52살에 6번째 꺾였다. 공권력이 그의 진료소를 거덜 냈다.


그는 겹 허리를 지녔음에 틀림이 없다. 꺾인 허리를 그때마다 일으켜 세우고 길섶으로 기어 나왔으니 말이다. 가장자리이긴 해도 오늘 그는 기어이 길 위를 걷고 있다. 그 가장자리 길에는 아픈 사람이 있다. 아픈 사람이 있으므로 아픈 이야기가 있다. 지나가는 인연이라도 아픈 사람이, 구성된 내러티브라도 아픈 이야기가 ㅂㅇ 실재다. ㅂㅇ 실재 방식은 그러니까 숙의다.


존재 둘이 부딪치면 소리 하나를 낸다. 사람 둘이 숙의하면 새 삶 하나를 창조한다. 숙의가 창조하는 새 삶은 상호작용이 깔아놓는 연속된 휜 공간에서 찰나마다 불연속적 변화 사건을 빚어낸다. 숙의치료 변화는 물론 아픈 사람한테서 일어난다. 거기에 목적이 있다. 목적을 넘어서는 축복이 있다. 치료자 변화. 치료자 또한 유한한 도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치료자 또한 아프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존재 둘이 부딪치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소리를 낸다. 사람 둘이 숙의하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새 삶을 창조한다. 숙의치료는 나지막한 아픔 연대다. 공동체 운동 종잣돈이다. 자본이 신자유주의 바이러스로 공동체를 박멸하고 있는 21세기에 가장 유력한 처방은 숙의의학, 그러니까 정신생물학적 약자가 일으키는 소미심심小微沁心(작디작게 작디작은 존재 사건에 배어드는 마음) 네트워킹이다.


그 네트워킹에 내가 참여하는 길은 묵묵한 경청이라 생각했다. 그가 어찌 보면 실패로 점철된 한 생을 살아가는 동안, 결곡한 마음 챙김으로 증득한 종자신뢰에 무슨 입을 댄들 사족이 아니겠나 싶으니 말이다. 그와 나는 늦은 밤 밥집을 나서며, 평담한 악수를 나누었다. 구름 위를 걷듯 사뿐사뿐, 술에 취한 듯 허정허정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만가만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ㅂ.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