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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05.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00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24  


        

공현(共絃)   

  

경험에서 오지 않았다면 그 무엇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지만, 경험하지 않으면 제대로, 아니 전혀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몸으로 알아야 할 일이 무엇보다 그러하다. 몸에 가까운 앎일수록 경험은 묵직한 표지다.   

   

감정은 근본적으로 직접적인 몸 느낌 파동 정보다. 그 직접적인 몸 느낌에서 비롯하여 겹과 결이 다양하게 갈라져 나갈 뿐이다. 공포-불안-공황은 가장 직접적인 몸 감정에 속한다. 병리적 공포-불안-공황은 간접 경험이나 이론으로는 전혀 앎이 일어나지 않는 감정이다.   

   

0은 한숨과 한숨 사이로, 나직나직 속삭이듯, 재빨리 말하는 5-1과 띄엄띄엄 몇 달 동안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출생 직후부터 10대 초반까지 어머니 아닌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연속과 인정, 그리고 수용으로 이어지는 모성은 그에게 그리움과 원망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는 단절과 부정, 그리고 거부가 몰고 온 공포·불안, 고립, 무력감에 휘말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학령기 이전부터 시작된 정신장애는 청년 초기 정점을 찍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은 그가 못 박혀 있는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소심하고 무능해서 그러니 다 제 팔자지 어쩌겠나, 정도로 방치했다.  

    

5-1은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버려졌습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남들은 나를 모릅니다, 모르면서도 나를 비난합니다, 나는 순수하고 진실한데 세상은 부조리합니다.···”  

    

0은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서 조목조목 딱 하나,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정말 그렇습니까?” 

    

처음에는 화를 내며 아, 정말이라니까요, 하더니 점차 5-1은 0이 하는 질문 실체를 알아차려 갔다. 나중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아닌 줄 다 압니다. 그런데 아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네요.”  

   

0은 그렇지 않은 맞은편 진실을 단순명료하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세상 쪽으로 돌아서는가 싶더니 5-1은 어느 날부턴가 홀연히 발길을 끊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돌아보면서 빠뜨린 점이 무엇이었는지 0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그 무렵까지 마음 치유하는 의자로서 지녀온 관심사와 감각은 우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경험이 가져다준 알토란같은 앎으로 말미암아 우울은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픈 사람 체취만으로도 우울장애 유형을 알 수 있었다. 아픈 사람 마음결에 스미듯 깃들 수 있었다. 그들 눈길이 머무는 곳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불안 쪽은 사뭇 달랐다. 중간 정도 고소 공포를 제외하고는 공포·불안 계통의 병리적 경험이 없었던 탓에 기본 감각과 공감 능력이 우울장애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다. 약물치료만 하면 되는 정신과 양의사라면 크게 문제 될 일 없지만 숙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상호소통을 하려는 그로서는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었다. 이론적 대응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막막해서 두려운 상황이 그때그때 연출되었다. 이런 동요는 분명히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리라. 

     

5-1과 더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 자책감에 잠겨 있던 어느 날, 0에게 하늘이 주신 기회가 찾아왔다. 공권력이 급습해 오는 바람에 제법 긴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공포·불안에 시달리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검찰청을 포함한 여러 관공서를 드나들며 겪은 공포·불안은 어린 시절 가족 간에 겪은 바와는 결이 달랐지만, 그 뒤 공포·불안 스펙트럼 환자들과 마주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5-1을 지금 만난다면 어떨까, 0은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 나눈 대화가 말짱 무용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변화에 가 닿는 공현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개소리 

    

사회적 약자가 정신장애에 더 많이 걸린다는 통계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유한 계층 사람들 가운데 정신장애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통계는 공존한다. 당연히 각기 다른 이유와 같은 근거도 공존한다. 먹고살기 힘들어 정신이 피폐해지는 증상과 돈이 너무 많아 영혼이 파리해지는 증상은 물질에 휘말린 상태라는 본질 하나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먹고살기 바쁜데 우울증 걸릴 새가 어디 있어?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이야? 다시없는 개소리다. 

    

5-2는 유서 깊은 부자 동네 고급 아파트에 산다. 심지어 장래가 촉망되는 법조인. 단정하고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아니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일까? 툭 치면 바로 울음을 터뜨릴 듯 위태로운 표정으로 그가 들어섰다.     

  

5-2는 자신이 누리는 부가 자신에게, 자기 삶에 무엇인지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처음부터 있었고 늘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터이기에 마치 자기 몸처럼 자각 없이 누리고 부려왔다; 무심코 자기 인격과 정신을 이루는 불가결한 일부라고 여겨왔다.      


어느 날 5-2는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던 그 낙원 밖으로 나갈 일과 맞닥뜨리게 된다.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본가로 오기는 하지만, 낯선 지방 도시 외곽에서 장기간 홀로 불편한 자취 생활을 해야 했다. 이 갑작스러운 분리는 정신적으로 그에게 날카로운 금을 내어버렸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 파고가 높아졌다. 불안이 덮치면 자기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사는 의미도 재미도 사라져갔다. 쓸쓸함과 외로움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족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으레 그 전형적인 “뭐가 부족해서” 식 반응을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가 악화 일로를 걷자, 어머니는 ‘대한민국 최고 병원’으로 그를 데려갔다. 정신과전문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몇 가지 물어보더니 약을 처방해 주고 2주일 뒤에 오라고 했다. 그는 하릴없이 돌아서 나왔다. 약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수소문 끝에 반신반의하면서 숙의 치유한다는 한의사를 찾아갔다.      


5-2는 매우 초조해했다. 하루빨리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도 없었다. 가족력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특별한 요법을 쓸 수도 없으므로 0은 그에게 이치를 설명하고 반복적인 숙의만이 길이라고 말했다. 이 터널을 잘 통과하면 전혀 새로운 삶이 열린다고 밝혀주었다. 그는 세 번째 약속한 날 오지 않았다. 두 번이 반복 임계점이라고 여길 정도로 똑똑했으므로.          


가면무도회 

    

내 이름 5-3은 동종 업계에서 뜨르르하다. 내 성공은 극단적 영업 전략 구사에서 비롯했다. 극단적 영업 전략은 내가 지닌 극단적 세계관의 구체화다. 내 극단적 세계관은 생애 어느 순간 입은 날카로운 트라우마에서 이루어졌다.   

   

승승장구 사회경제적 성공 가도를 달려 안정 풍요를 구가할 만한 시점에 다다른 어느 날, 나는 충격적 공허와 마주쳤다. 당혹감은 나를 주저앉혔다. 이 깊고 텅 빈 어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이른바 ‘영성 프로모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기품 없으되 ‘경영 마인드’ 갑인 자기 계발 프로젝트에 거금을 쏟아부어 공허감 극복을 시도했다.      


물론 효과는 있었다. 문제는 효과가 반드시 단계별로 나누어 나타난다는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효과는 다음 효과를 위한 미끼여야 하니 말이다. 높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요구하는 돈은 당연히 수직으로 상승한다. 어느 순간 선택 기로에 선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나는 혹시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소개받은 숙의 치유자를 찾았다.  


        

숙의를 시작하자마자 대뜸 나는 5-3이 많은 가면을 쓰고 산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었다. 가면을 쓰는 까닭은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까닭은 자기 삶 소중한 일부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가면이 많다는 사실은 삶 곳곳에 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둠을 억누르고 산다는 증거다; 결국 삶 전반이 거대한 자기부정증후군에 빠져 있다는 증거다. 나는 나직나직 말했다.   

  

“이런 상태를 의학에서는 우울장애라고 합니다.” 

     

찰나적으로 그 눈빛이 날카롭게 흔들렸다. 아마 처음 듣는 말이었으리라. 그는 예의 그 가면으로 능숙하게 눙치고 지나갔다. 나는 모르는 척, 무심한 어조로 처방을 내렸다.    

 

“치료가 필요하지, 자기 계발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자기 계발이 메우는 바는 공허가 아니라 공허‘감’일 뿐입니다. 공허가 실재임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려면 우울 본진과 마주 서야 합니다.”   

  

수긍 여부와 무관한 표정으로 그는 심각하게 고려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얼마 뒤, 그가 자신이 참여했던 자기 계발 프로젝트와 관련된 일에 더 큰 돈을 투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론 그 길은 그가 결정할 권리를 지닌다. 나는 그 결정이 독선이 낳은 독단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화살은 이미 어긋난 방향으로 떠나버렸다.   

   

마냥 휑한 것만은 아니었다. 5-3 덕분에 잠시나마 속물근성 댕댕하게 불려 끌탕할 수 있었다. 아, 그 돈이 개 아깝게 느껴지지 뭔가. ㅍㅎㅍ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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