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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pr 06.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01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팡이실이 숙의 서사 25  


        

대화법 

    

숙의 치유 예약을 한 뒤, 다시 나는 0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가기 전에, 도움이 될 만한 내 이야기를 미리 적어 보내고 싶다는 취지를 전했다. 나는 결혼생활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꼼꼼히 적어 메일을 보냈다. 나는 이런 갈래 사람이었다. 


          

5-4의 배우자는 그와 전혀 다른 갈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맥락을 고려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줄 몰랐다.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매사를 판단해 걸핏하면 사표 내고, 막말하고, 이혼하자 달려들었다. 자기 신뢰가 부족해 사소한 데 자존심을 내걸곤 했다. 매사 부정적이어서 불평불만을 일삼았다. 자주 격분에 빠져들어 조절 불가능한 상태로 날뛰었다. 급기야 만취된 어느 날, 귀신과 대화한다며 기괴한 광경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나는 인내를 가지고 여러 차례 진지한 대화를 시도했다. 부부 상담도 받았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 매번 나온 결론은 이혼이었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0이라고 해서 무슨 마법을 부리는 게 아니니, 뾰족 수가 있을 리 없다. 나를 공감·지지하는 정서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한번 대화·협상 기본 원리를 확인하고, 다른 데서는 쉽게 들어보지 못했을 법한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스 고전 수사법. 남녀 성차를 고려한 대화법. 전체 맥락을 잡고 압도하는 대화법. 최후 발언과 문맥 차단을 통한 대화 정리법. 정신장애 요소를 지닌 성인에게 하는 아동 상대 대화법.  

   

무엇보다 0이 내게 재삼재사 강조했던 바는 맨 마지막 대화법이다. 모든 정신장애에는 발달장애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는 정신의학적 전제에 입각한바 한 가지 원칙, 세 가지 규칙만 지키면 된다. 한 가지 원칙: 함께 내린 결론은 반드시 관철한다. 3가지 규칙: 이인칭 어법, 금지 어법, 두괄식 어법을 금한다. 팁: 관계에 기대게 하지 않는다. 팁의 팁: 호칭은 관계 호칭 아닌 고유명을 쓴다.  


         

배운 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나. 쉽지 않았으리라. 제법 시간이 흐른 어느 날 5-4에게서 연락이 왔다. 진심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선생님이 함께해 주신 덕분에 드디어 끝냈습니다.”  



        

법원에서 오는 길   

  

0을 처음 찾아간 것은 결혼생활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내 심리적 문제 때문이었다. 아버지 폭력은 청소년기 내 기억 전반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또 하나 선명한 얼룩은, 남편과 시부모에게 학대당하던 어머니가 분노를 내게 드러내면서 퍼부었던 욕설이었다. 이 상처는 내게 변형된 방어기제로 발현되었다. 내부에서 날뛰는 폭력성을 밖으로 내보낼 때는 놀림·깔봄·비아냥거림으로 표현했다. 토론에서 이겨 상대방에게 모욕 주는 상상을 되풀이하면서 날카로운 논리적 문장 따위를 암기하곤 했다. 그럴수록 내적 평화는 깨지고 사회생활은 뒤틀렸다. 몇 차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치료받아야겠다는 결론을 황급히 내렸을 때, 우연히 그를 발견했다. 


  

5-5와 숙의를 진행하는 동안, 필요한 요법으로 기억과 격정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런 부분들이 정리되면서 이야기는 원가족에서 점차 배우자로 넘어갔다. 배우자가 그를 대하는 방식은 그가 드러내는 방어기제와 흡사했다. 목소리 등 사소한 인신 문제를 빌미로 좀 더 야비하게 조롱하는 습관이 있지만 본질이 같아 보였다. 아마도 그에게 배우자 그런 측면이 병적 매혹으로 작동했으리라. 더군다나 배우자는 출신 지역이나 학력 따위 문제에서 드러나는 열등감을, 변형된 공격으로 위장해 사사건건 괴롭혔다. 나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말했다.   

  

“제가 드릴 말씀이 무엇인지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일방적 이야기이므로 충분한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배우자에게 기회를 주시지요. 함께 오세요.”   

  

다음 주, 부부가 내 앞에 나타났다. 5-5에게 수 주 동안 들은 이야기를 백지로 돌리고 투명한 마음으로 배우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30분 남짓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가 말한 이상으로 훨씬 더 강한 에너지 결을 배우자에게서 감지했다. ‘옳지 않다.’라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와 함께 두면 안 된다.’라는 문제였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배우자에게는 포식자 에너지가 흐르고 있었다. 내가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식사 도중, 배우자 직속 상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사적인 일이라 하면서도 배우자는 나와 그를 남겨두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는 떠나는 배우자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에게 말했다. 

    

“제가 무슨 말씀 더 드려야 할까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봄날, 나는 꽃 한 아름 안고 0 진료소를 찾았다. 예약 없이 들이닥친 나를 보고 간호사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안고 있는 꽃을 확인하고는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채 원장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들어오시랍니다,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0에게 직각 허리로 인사를 했다.  

   

“법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고맙습니다.”     


그 뒤, 나는 어머니·친구·선배를 0에게 소개해, 병과 삶 문제를 숙의하도록 도왔다. 10년 세월이 훨씬 더 지난 지금도, 잊을 만하면 연락한다.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잔한다. 물론 더 이상 결혼 이야기 따위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성 친구와 어떻게 성생활을 하는가와 같은 꿀잼난 이야기가 있는데 뭐 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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