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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Jun 28. 2024

나나보조 이야기 272

-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36    


      

나는 국사편찬위원회가 극심하게 편찮다    

 

미도산 마지막 이야기를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을 걸은 뒤 따끈한 국수로 점심을 먹으며 저녁때까지 남은 시간엔 어디를 걸을까 생각한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개화산 국립국어원이다. 시간상 맞지 않아 다음으로 미룬다. 그다음으로는 관악산 국사편찬위원회다.   

   


내가 국사편찬위원회를 떠올린 까닭은 특권층 부역 지식인 가운데 사학계 양대 아이콘인 이병도와 신석호에 대한 사전 지식 때문이다. 그들이 해방 후 무슨 짓을 했는지 소상히 알지 못하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는 짐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잠시 자료를 찾아보다 이헌동 님이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사학계를 장악했는가』(김병기)라는 책에 관해 쓴 글과 마주친다. 그 글만으로도 내가 국사편찬위원회를 반제국주의 걷기 대상으로 삼을 이유가 차고 넘친다.

     

특히 신석호, 그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신인 국사관 수장이었다. 그런데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역대 위원장 소개란 첫 칸에는 “국사관장 신석호(1946.3.23.~1949.3)”가 있고, 같은 칸 아랫부분에 작고 옅은 글씨로 “문교부장관 겸직 위원장(1949.03~1965.01)”이라고 쓰여 있다. 그 기간에 문교부 장관은 이름만 걸어놓고 신석호가 사실상 위원장 노릇을 했다는 의미인가. 1990년 간행된 <국사편찬위원회사>는 신석호 재임 기간을 1929년 4월~1965년 1월로 적시했다(1929년은 신석호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근무를 개시한 해다). 이 기록은 우리 의문에 대한 답일 뿐만 아니라, 국사편찬위원회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를 이어받았다고 하는 정체성 고백이기도 하다.     


가슴에 날 세워 관악산 남동쪽 기슭으로 간다. 익히 아는 길이라 눈 덮인 관악산을 바라보기도 하며, 가로수에 돋아난 버섯 사진을 찍기도 하며 천천히 국사편찬위원회로 다가간다. 도착해 정문 경비실 직원에게 안으로 들어가 돌아볼 수 있느냐 물으니 안 된단다. 잠깐 사진 한 장만 찍겠다고 하자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사진을 찍고 나와 크게 돌아 관악산 둘레길로 접어든다. 건너편 청계산이 바라다보이는 기슭에 이르러 국사편찬위원회가 깔고 앉은 아프고 슬픈 모순을 곱씹으며 석부(石符) 하나 세운다.

    

 

이헌동 님은 글에서 짝퉁 진보역사학계가 어떻게 내부 부역을 자행하는지 통렬하게 비판한다. 제 나라 역사를 부역질 도구로 써먹는 이 간악한 패거리와 나는 과연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이 알량한 글 쪼가리 저들이 볼 리 없으니 내 마주함이란 결국 외눈길일 뿐인지.



*



미도산 여운 

    

미도산 발치 메리어트호텔 앞 거리 정원 귀퉁이에서 소나무 동강 하나를 거뒀다. 필경 조경 작업에 쓰였던 긴 막대기 자투리일 테다. 흙 묻은 채로 코끝에 대니 소나무 향이 말갛게 피어난다. 깨끗이 씻어 한의원 내 방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향이 계속 느낌을 타고 전해지기에 퇴근하면서 방문을 닫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해 문을 여니 소나무 향이 방안에 자욱하다!   

   

수직 절단한 면은 지름이 4cm이고, 경사 절단한 반대면 긴 쪽 길이가 7cm 남짓한 나무 동강에서 이런 기운이 나온다. “나무를 벤다고 그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다.”라고 누군가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물론 향기를 피운다는 말과 살아 있다는 말이 같은 실재를 지닌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이렇게 경이로운 시공에서라면 두 말이 지닌 차이란 얼마나 사소한 것이랴. 진정 고마워하며 미도산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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