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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용원 Aug 17. 2024

정도 차이


물 걷기가 일찍 끝나 가족과 약속한 시각까지 시간이 낙낙한 어느 일요일 오후. 점심을 먹다가 스마트폰 배터리가 다 돼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충전기를 꺼내면서 보니 코드가 없다.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해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청소를 미루고 일찍 나온 탓에 옆지기와 딸 방이 속 시끄럽게 어질러진 상태 그대로다. 마침 이렇게 들어왔으니 깔끔하게 청소해 놓는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굳이 얘깃거리 삼을 며리가 없다 싶어서 아까 일은 말하지 않는다.    

  

방에 들어서면서 옆지기가 가볍게 ‘어라, 방이 깨끗하네?’ 했을 뿐 별다른 반응은 없다. 더 어수선했던 방 주인인 딸은 아예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적잖이 놀랐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어떤 깨우침 탓이다.     


“이 정도 변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눈에 들어와도 눈여겨 보지 않는구나.” 

    

그동안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정서 격차가 이런 진실을 담고 있다니. 단칼에 뭔가 훅 잘려 나간 느낌이 든다. 오싹하는 각성이 들이닥침과 동시에 몸도 맘도 털썩 이완된다. 내가 멀찌막한 변방 사람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내 옆지기와 딸이 특이한 사람이 아닌 이상 내 각성은 이상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 감각이 지나치게 성긴 게 아니라, 내 감각이 지나치게 촘촘한 거다. 내 이 지나침이 바로 깊은 우울증이었다. 우울증에서 발원한 천명 따라 산다.     


내 천명 따라 살면 되고 남 천명에 따따부따하는 일은 주제넘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들이 자라지 않고 네오테니즘에 잠겨 있을지라도, 그 삶은 궁극으로 내 영역이 아니다. 제자도 환자도 똑 그렇다. 오직 극진히 바라볼 뿐이다.   

 

  

내가 유난히 어른답지 못한 어른을 싸늘히 대하는 까닭은 내가 아이인 적이 없어서다. 태어나는 순간, 아니 필경 그 전부터 나는 아이기를 거절당해 늘 어른으로 살아왔다. 이 삶이 바로 자학인데 자랑으로 여겨서 자만이 된 듯하다.   

  

  

모든 차이는 정도 차이다. 본성도 상태함수 문제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부지불식간에 본성을 실체처럼 대하면서 살아왔다. 유교 가부장과 서구 과학 논리가 주입한 독이 여간 그악하지 않다. 찰나마다 암팡지게 깨쳐야만 참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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