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말할 때, 청빈(淸貧)이라 하면 유교, 안빈(安貧)이라 하면 도교, 성빈(聖貧)이라 하면 천주교, 인욕(忍辱)이라 하면 불교가 떠오른다. 그 가운데 맨 나중 인욕은 물론 가난에 국한한 말이 아니지만 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만큼 욕된 일이 없으니 다른 말과 나란히 놓아도 크게 무리는 없겠다.
인욕에 관해 나는 진욕(進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찌감치 자기 삶의 적극 능동 좌표로 삼아두지 않으면 이런 비아냥을 듣기 때문이다: 실패한 자가 늘어놓는 자기변명이다. 제국 자본주의 논리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주제에 돈 버는 거 관심 없다 하면 위선이 된다는 말이다. 과연 그렇다.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감히 자기변명을 선택했다. 한의사가 우울증을 상담, 곧 숙의(熟議)로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돈을 벌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오은영이 100만 원을 받을 때 나는 15만 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이 한의사를 대우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나는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만큼 나는 가난을 삶 샅샅이 들여놓았다. 궁상맞은 일을 서슴없이 하고도 ‘쪽팔리지’ 않다. 나는 이런 삶을 청빈·안빈·성빈, 그 어느 말로도 미화하지 않는다. 가난은 항일 무장투쟁 전사 후손으로서 내가 반제 전투에서 쓰는 병기다. 이 병기가 나를 “제국적 생활양식”에 살해되지 않게 한다.
내가 버는 적은 돈, 그 병기 때문에 자원·에너지 집약적인 “제국적 생활양식”(울리히 브란트·마르쿠스 비센)이 내 삶 본진을 공략할 수가 없다. 한평생 나는 내 이름으로 집·자동차를 가진 적도, 육식을 위해 음식점에 들어간 적도, 은행 계좌에 단돈(!) 천만 원을 넣어 놓은 적도 없다. 진심으로 고맙다.
가난이 고맙다고 하니 누가 묻는다: 불안하지 않나요? 산속 승려가 아닌 이상 목돈 들어갈 일이 돌발할 수도 있는데 전혀 대책이 없다면 불안은 당연하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 정도 일이면 운명입니다. 그런 일을 걱정하는 대신 나는 작디작은 틈새에서 죽은 돈을 산 돈 만드는 기회를 찾아낸다.
그동안 서울특별시 어르신 교통카드를 쓰지 않았다. 중앙 정부가 한의원에 쓰는 방식과 같은 속임수를 쓰는 게 괘씸해서다. 최근에 생각을 바꿨다. 그래도 거긴 도시철도공사고 나는 극빈 한의사이므로 같은 급이 아니다. 절약되는 푼돈이나마 기부/후원해 죽은 돈을 산 돈으로 만드는 일도 반제 전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