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신약성서 『마타이오스(마태)의 복음서』 제11장 28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그동안 이 말에 수많은 기독교도가 위로받았음은 물론이다. 더 많이 배반당했음 또한 물론이다. 왜 배반당했을까?
쉬게 한다는 말이 잠깐 쉬다 가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면 결국은 구원한다는 말일 텐데, 그다음 구절과 부딪친다: 내 짐은 가볍다. 아니, 짐을 내려놓게 한다는 말 아니었나? 세금 감해주는 정도를 가지고 구원이라 한 거야? 우리는 이렇게 배반당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짐이 짐 아니게 하는 길은 무엇일까? 짐을 내려놓게 하는 거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다. 어른 생각은 이렇다: 짐이 몸으로 여겨질 만큼 지는 거다.
생명이란 본성상 열역학제이법칙을 거슬러 가는, 그러니까 “짐 지는” 사건이다. 누구도, 무엇도 이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자기 짐은 꼭 똑 자기가 져야 한다. 꼭 똑 지는 자기 짐은, 그러므로 짐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과도하게 질 때 그게 바로 “짐”이다.
예수가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한 까닭을 정치적으로 추적해 보자. 당시 유대는 로마 식민지였다. 식민지 백성에게서 종주국 시민이 내는 세금보다 더 많이 착취하는 게 제국 본성이므로 당연히 유대 백성은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그 짐을 가볍게 해준다는 약속은 결국 독립( 전쟁)을 가리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정신적,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영적 해석으로 흘러간다. 어떤 이는 이런 전통을 자칭 사도 파울루스(바울) 영향이라 말한다. 말하자면 특권층 부역자였던 파울루스가 예수 운동을 매판 종교로 둔갑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된 기독론이 기독교를 왜곡했다는 주장이다. 통속 기독교도는 펄펄 뛰겠지만 우리는 절절하게 듣는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독립 국가라고 하지만 사실상 식민지로서 전작권을 가진 주한미군 체재 비용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왜놈들이 해양 투기한 원전 오염수 피해를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매국 특권층이 정권을 잡고 자기 패거리한테 깎아준 세금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왜놈들이 창경궁 희화화하듯 청와대 희화화하고 따로 대통령실 만들고 관저 마련하는 데 드는 세금을 우리가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할 짐만 지고 싶다. 우리 몸으로 여겨질 만큼만 지고 싶다. 그게 독립 국가며 민주 국가 아닌가. 이 자주·민주 국가를 약속하는 예수는 없는가. 이 소식을 전하는 복음은 없는가.
어제 우리는 기독교인 두 사람과 숙의 치료를 했다. 한 사람은 남의 짐까지 짊어지고 애쓰며 산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자기가 깔려 죽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며 죽을상이다. 앞 사람은 남의 짐 돌려줄 결심을 어렵사리 세웠다. 뒷사람은 가짜 짐 내려놓을 결심을 쉽게 거절했다. 실제 식민 살이 벗어나기는 어렵고, 자작 식민 살이 길들기는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