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열한 번째 선다. 어느 순간 내 눈앞에 김용균 재단 김미숙 대표가 깃발을 들고 나타난다. 사실 지난주에도 그는 이 광장에 서 있었다. 그때는 깃발 아닌 조그만 종이판을 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전에도 더 그전에도 그는 여기 있었을 테고, 또 어쩌면 처음에는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과정을 되짚어 보면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그가 아들 잃은 뒤 어떻게 삶을 바꿔왔을지 짐작할 수 있다. 잔잔히 머금은 그 웃음이 여태도 눈에 어린다.
진부한 일상에서 신성한 제의가 솟아나는 카이로스는 흔히 생각하듯 처음부터 지적으로 작업한 설계 따위로 형성되지 않는다. 예측도 통제도 끼어들 틈 없는 어떤 찰나에 비수처럼 그러나 아지랑이같이 일상을 무너뜨리며 신성이 열린다. 이 신성은 예리하고 섬세한 팡이실이 상호작용으로서 제의를 모든 존재 온 생명이 참여하는 열린 창발 사건이게 한다. 닫힌 제의는 형용 모순이다. 제의 탈을 쓰고 신성을 훔쳐 사유하는 협잡이 바로 음모다. 김명신이 음모 화신이다.
김명신은 전국 명산을 돌며 자신과 기둥서방 사적 이익을 위해 굿을 했다. 물론 그 비용 수십억 원은 우리 세금이다. 더군다나 이재명 척살 굿은 직접 했다.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라 떠든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던 거다. 어떤 잡신이 그 몸주인지 모르지만 내가 단박에 내쫓을 수 있는데 만날 방법이 없다.^^ 잡신 들린 삼류 무당이 벌인 가짜 제의, 그러니까 주술 음모에 무슨 영검이 있으랴만 이런 해괴한 작태를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다.
그동안 천공, 건진, 명태균 같은 껄렁한 음모꾼 이야기가 수없이 등장했지만 대체로 가십이나 스캔들 정도로 비아냥거리며 씹는 데서 그쳤다. 안 된다. 공식 정치 담론 주제로 삼아야 한다. 과학적 인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연결이지만 분명히 그런 논리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급기야 친위쿠데타까지 일으켰다. 지금처럼 대응하면 앞으로도 수많은 김명신이 나타나 똑같은 짓을 할 수밖에 없다. 정작 더 심각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 있다. 통속 고등종교 집단이다.
흔히 이렇게 말한다: 아니 기독교가 어떻게 사이비 무당짓을 용납한단 말인가? 한참 모르는 소리다. 목사와 스님 복장만 빼면 저들도 다 사이비 무당이다. 목사나 스님이라는 사회적 위상에 올라타고 있으니 실은 저들이 풍기는 악취가 훨씬 더 심하다. 본인도 신도도 자기 성찰 능력이 전혀 없다. 고등 영성을 전유한 채 일극 집중 신정체제에 매몰되어 있으니 그냥(!) 무당보다 더 그악하다. 저들 고래 등 같은 예배당과 사찰은 제의와는 무관한 음모 생산 소굴일 뿐이다.
참된 제의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일어나고 행해진다. 김미숙이 머금은 잔잔한 웃음이 시공을 신성하게 물들인다. 김미숙 제의는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야 들이닥쳤다. 신성은 패자 본성이다. 승자는 본성상 신성과 척을 이룬다. 패자 필생 승자 필멸은 이렇게도 진리다. 한의대 후배들 학회 공식 행사에 초대받아 조금 일찍 광장을 떠나다가 다시 한번 김미숙 섰던 곳을 뒤돌아본다. 물론 그는 거기를 떠났지만 그 신성이 여전히 거기서 광채를 발하고 있다. 깊이 머리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