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새벽, 꿈에서 꿈 밖으로 뛰쳐나오는 꿈을 세 번이나 꾸었다. 결국은 깨어서 꿈 서사가 가리킨 방향에 맞추어 날래고도 드넓게 각성 또는 치유를 겪어냈다. 각성 또는 치유라고 표현한 까닭은 꿈 서사에서 나는 어떤 잘못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꿈 밖으로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꿈 서사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죄책감과 수치심을 생생하게 전달해 줄 뿐이다. 그 감정들이 너무나 맹렬해 꿈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을 수 없다. 어둠 속 내 상념 은막에는 지난날 내가 저질렀던 잘못들이 동영상으로 엄청 빠르게 달려든다. 독하게 직면하고 참회하고 흘려보내는 작업을 계속한다.
어느 순간 은막이 사라진다. 나는 벌떡 일어나 정좌한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필경 어제 읽은 책이 방아쇠렷다. 그 책은 내가 딸아이 양육 과정에서 저지른 뼈아픈 실수를 과학으로 지적했고, 나는 읽다가 여러 번 책을 덮어야 했다. 물론, 이미 다 알고 수도 없이 뉘우쳤으나 여전히 죄책감은 가슴에 사무치게 맺혀 맴돌고 있다.
딸아이에서 출발해 수많은 사람이 슬프고 아픈 모습으로 나타나 옛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특히 상담했던 사람들이 내 실수와 실패를 가차 없이 지적한다. 나는 일일이 낱낱이 받아들인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극한으로 추체험한다. 거기 멈춰서서 심리 치유를 시행한다. 아득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오전 네 시 십육 분이다.
2023년 1월 22일 도봉산 눈 덮인 골짜기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내가 무지렁이 부역자라는 뼈아픈 진실에 눈떴다. 이를테면 거시 각성이다. 오늘 새벽 나는 내가 사악함, 치졸함, 비굴함으로 범벅된 트릭스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닫는다. 이를테면 미시 각성이다. 큰 주의와 작은 집중이 비로소 융합한 셈이다.
참담과 참신이 역설로 만난 이른 아침, 나는 이리도 나지막이 느지막이 살아가는 내 영혼을 끌어안고 다독거린다. 그렇다. 낮으니 내 생명, 늦으니 내 생애다. 자주민주 혁명일에 나는 알량한 깨달음 하나 얻어서 달랑달랑 출근한다. 대체공휴일 있는 연휴라 한의원이야 한산할 테지만 윤석열 경축사 없는 삼일절은 찐 기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