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막걸리
비가 내렸다.
제주에선 비가 자주 오지만, 거센 바람 탓인지 가로로 내리는 비를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바람조차 거의 불지 않아 세로로 곧게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볼 수 있는 날이었다.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은 유리창을 따라 느리게 미끄러지고, 회색 하늘 아래 집안까지 촉촉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매콤한 음식을 먹고 싶어진 나는 가만에 배달 어플을 열었다. 30여분 뒤 현관 앞으로 도착한 아귀찜이 무척 반가웠다. 플라스틱 통 안에 담긴 음식을 커다란 냄비에 옮겨 담았다. 냄비 안에서 매콤한 양념과 아귀, 주꾸미가 어우러져있는 모습을 보자니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였다.
남편은 조용히 냉장고에서 차가운 막걸리 한 병을 꺼내고, 아끼는 항아리 모양의 막걸리잔을 손에 들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이, 금세 무겁게만 느껴지던 하루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듯했다. 아이들은 아귀찜 앞에 둘러앉아 각자 좋아하는 부위를 골라 먹었다. 미더덕을 먼저 집어 먹는 아이, 아귀살을 손으로 쏙쏙 발라내는 아이, 주꾸미를 조심스레 집어 먹는 아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자연스레 웃음이 흘렀다.
나는 주꾸미를 집어 올려 매운 양념을 잔뜩 묻힌 채 입으로 넣었다. 그리고 곧이어 막걸리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하면서도 달콤한 맛과 뜨끈한 주꾸미가 입안을 감돌며 기분 좋은 느낌을 선사했다.
거실 안 공기는 따뜻하고 촉촉했다. 매운 양념 냄새와 막걸리 향, 아이들의 웃음, 창밖 비가 만들어낸 잔잔한 소리까지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나는 아이들의 작은 손과 남편의 조용한 움직임을 바라보며, 말없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평화를 마음속 깊이 새겼다.
평범한 하루였지만, 먼 훗날 돌아보면 오늘 이 비 오는 오후, 아귀찜과 막걸리, 음악과 웃음이 함께한 순간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될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오늘의 비가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조금 더 오래, 지금의 시간과 식탁이 그대로 머물기를. 창밖 빗방울 하나하나가 천천히 흘러내리는 동안, 마음속으로 조용히 소원을 속삭였다. 비가 주는 여유, 가족과의 온기, 그리고 이 소소한 행복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기를.
이제야 깨닫는다. 평범한 날 속에서 찾아낸 작고 느린 행복이, 시간이 지나 가장 오래 남는 풍경이라는 것을. 창밖의 비는 여전히 세로로 내리고, 부엌의 매운 냄새는 여전히 따뜻하게 퍼지고 있었다. 오늘의 이 순간, 이 식탁 위의 온기, 그리고 조용한 행복이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기를 바라며, 나는 막걸리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