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보 시론-4·19혁명의 필연성과 교훈

by 제주일보

문두흥, 수필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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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4·19 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로 62주년 되는 날입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 중심으로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에 항거한 운동입니다. 3·15 부정 선거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에 항의해 일어났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허 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지요. 1973년 3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4·19의거 기념일’로 제정됐고, 1994년 12월 ‘4·19혁명 기념일’로 변경됐습니다. 기념행사는 국가보훈처가 주관합니다. 법정기념일로 제정된 비 공휴일입니다.



발단은 1960년 자유당 정부의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과정입니다. 당일 마산에서 40% 사전투표와 3인조 공개투표 부정 현장이 발각돼 시민들은 이에 항의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시위대는 1만여 명으로 늘어나자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7명이 사망, 870명이 부상했습니다. 그 무렵 4월 11일 오전 마산 앞바다에 마산 상고생 김주열 학생의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 떠오른 시체를 발견했지요. 격분한 시민들은 전역(全域)에서 규탄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그 후 4월 18일 고려대생들이 3·15 부정 선거 규탄대회 후 귀가 도중에 정치깡패들의 폭력으로 많은 학생이 부상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4월 19일 학생들이 경무대 정문까지 몰려갔습니다. 자유당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 김주열의 죽음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지요. 경찰들의 집중사격으로 현장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면서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대통령은 계엄령을 발동하려 했으나, 군인들마저 시위대 앞에서 우호적으로 나오며 대학교수도 시위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을 위해 공적을 많이 쌓고 6·25 전쟁에서 조국을 구한 분입니다. 그의 공과는 후세 학자가 평가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 선거 획책은 용서받지 못할 천추의 한을 남겼습니다. 문민정부 들어 1987년 개정된 헌법 전문(前文)에 ‘대한민국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혁명 배경에는 언론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1950년대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습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각 언론사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알렸지요. 이승만은 초기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됐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발전은 어느 순간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참여와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따른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국민의 참여와 노력으로 이뤄졌습니다. 근 현대사에서 처음 직접 정권을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매우 큰 뜻을 가집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4월 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라고 합니다. 4·19혁명의 정신과 가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4·19 혁명기념일을 맞아 다시 한번 민주 이념과 사회정의의 실현에 관해 진중하게 돌이켜 볼 때, 그날의 의미를 되살리는 길이 아닐까요. T. S. 엘리엇의 “가장 잔인한 달 4월”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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