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일보 시론) 인생의 겨울 지날때

by 제주일보

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특임교수/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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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졸고 계신다. 김광협 시인의 ‘유자꽃 피는 마을’에서 백발을 인 조모님이 툇마루 위에서 조을 듯, 내 어머니는 항용 유자꽃 꽃잎이 떨어질 듯 조신다. 연락선이 한 소절 울 때마다 떨어지는 꽃잎이 시인을 울렸듯, 올해 들어 백 세 된 어머니의 소멸하는 생명이 나를 마냥 슬프게 한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희망 찾기를 이야기하는 작가, 캐서린 메이는 ‘어떤 겨울은 부모님이 나이 듦에 따라 점진적으로 늘어난 돌봄의 부담과 함께 온다’고 하였다. 인생의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휴한기’라는 설명과 더불어.



그러므로 추운 계절을 살아내는 ‘겨울나기를 시작하라’며 친구가 요양보호사 교재를 보내주었다. 첫 장을 펴니, ‘한국전쟁을 전후로 태어난 노인세대는 국내외 산업체와 건설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여 우리나라를 세계 유수의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경제적 기여자’라고 쓰여 있다. 그러니까 겨울을 맞이한 이 시대의 노인들도 가슴 뛰던 봄과 활력 넘치는 여름, 풍성한 수확의 가을을 거쳐 왔단 얘기다. 우리 어머니에게도 복사꽃보다 더 어여쁜 20대, 육지물질을 오가던 30대, 고사리를 따라 한라산을 넘나들던 40대가 있었듯 말이다. 그리고 눈을 뜨면 습관처럼 ‘살암시민 살아진다’를 중얼거리시는 어머니는, 영락없는 제주도 할망이다. ‘살암시민…’이라는 말 속에는 ‘오몽해(움직여)지민 일을 해사주’라는 노동의 개념이 담겨 있다. 인간은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노동하는 인간)이며, 인간의 역사는 노동의 역사임을, 제주도 어머니들은 돌과 바람의 섬에서 저절로 터득했을 터다. 노동은 삶의 의미이며 할 일을 잊어버린 인간은 세상에서의 존재가치도 없음을 배웠으리라. 호모 라보란스에겐 노동이 생계수단일 뿐 아니라 존재증명이기도 하니까.



코로나19가 일상을 덮친 지 3년째인 지금, 가장 힘겹게 겨울나기에 직면해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제주연구원의 ‘코로나19 이후 제주지역 고용구조 변화와 정책방안’ 연구에 의하면 도·소매업 등에서 일자리를 잃은 취약계층으로 귀결된다. 무급·유급 휴직, 교대근무 전환 등이 증가하였고, 근로시간 단축을 시행하는 사업장이 크게 늘어난 연유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노동시장 동향에서는 지난해 실업급여 지급액이 약 12조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보였다. 실업급여는 고용보험 가입자가 정리해고 등 비자발적으로 일자리를 잃었을 때 지급되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고용한파가 그만큼 매서웠음을 의미한다. 연관된 한국은행 조사에서도 가구주와 배우자 모두 일자리가 잃어서 전혀 소득이 없는 비취업가구의 비중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특히 저소득 및 고대면 일자리 가구가 고용충격에 가장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살다보면 모든 것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러기에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을까. ‘반드시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 것처럼 차라리 혹독한 삶을 굳건하게 견디어 내라’면서.



주말에 올레 2코스를 걷다가 오조리 내수면을 딛고서 높새바람을 향해 고개를 치켜드는 청둥오리떼를 보았다. 성산포의 칼바람에 깃털이 꺾이지 않도록 바람방향으로 마주선 자기들처럼, ‘인생의 겨울이 숙명이라면 이를 악물고 다함께 견뎌내라’는 모양새다. 요양보호사 교재의 마지막 장은 심폐소생술이 차지한다. 어머니가 이 겨울을 무사히 지나시기를, 봄에는 고용시장도 유자꽃마냥 흐드러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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