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시론-무능한 아빠

by 제주일보

안재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논설위원


11.jpg


딸이 입원해야 한다고 한다. 일에 지쳤는가 보다.



예전에 아내는 강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부모다운 부모가 되지 못했다고 수시로 한숨짓는다. 보는 나도 나의 무능함이 슬프다.



힘들어할 틈도 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딸들의 고통을 도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씁쓸하다. 녀석들도 아프다고 푸념할 겨를도 없이 살아야 하는가 보다.



남들은 자식을 위해 대리시험조차도 마다하지 않는다는데, 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공부하라고 독려한 것 외에는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다. 녀석들이 아직 어렸을 때, 아빠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아빠는 우리가 공부를 못했으면 예뻐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이 정도라도 하니 도와주신다.”



그 말을 듣는 나는 참담하다. 내가 어찌했기에 딸들의 눈에 그런 아빠로 보였을까?



평소 아이들에게 “책을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말라”는 말은 자주 했지만, 서로 떨어져 있어, 함께 산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녀석들에게 공부하라고 말할 기회도 없었고 강요하지도 않았으며, 혹 있었다면 “스스로 실력을 갖추어 일어서라.”고 말없이 가르쳤을 뿐인데….



생각해보면, 그런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아련한 기억이 있다.



정해진 시간, 도서관의 정해진 자리에 앉아 무엇인가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던 한 여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이미 할머니가 되었을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심지어 앞모습은 본 적도 없지만, 당시 그 여학생의 뒷모습을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나는 무엇인가에 골몰하는 여인을 좋아하는가 보다.



사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한 적은 없었는데….



나도 잘 안다. 나와 아내는 별다른 재주가 없다. 그래서인지 딸들도 내세울 만한 재주가 없다. 그래서 남에게 무시 받지 않고 당당하게 살려면 공부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이 있니? 그렇다면 스스로 노력하여 가져라. 그리고 그것을 얻은 뒤에도 결코 나태해서는 안 된다.”



딸들에게는 반칙 없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강요하였고, 용돈 외에는 도와줄지도 몰랐으며, 혹 능력이 있다고 해도 도와줄 생각도 없었다. 오직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서로에게 당당하게 만나자. 아빠가 하는 일을 뒤로하고, 너희들을 도와줄 수는 없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이들에겐 상처였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스로 자리를 얻었지만,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하고, 병을 얻어 병원을 드나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쓰러지지 않는 한, 일을 계속해야 하는 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내가 무능하여 편하고 게으르게 살 수 있도록 해주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몇 푼 되지도 않은 용돈을 주면서도 “내가 한국은행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수준에 맞추어 쓰라”고 말하곤 했는데….



남들이 하듯 ‘내 돈은 내 돈이고, 네 돈도 내 돈이다.’고 생각하며 불의하게 살았어야 했을까?



이제는 딸들이 성장하여 엄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한다. “엄마 아빠는 저희에게 부양의 의무를 지우지 않으셨고, 바르고 반듯한 유전자까지 주셨으니 고맙다.” 나? 남의 부모는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곤 한다는데, 힘들게 사는 딸들에게 푼돈 한 번 도와주지 못한 내가 참담할 뿐이다. 녀석들이 기특하지만 우울하다.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http://www.jej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7042


작가의 이전글제주 춘하추동-전쟁이 주는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