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봉, 수필가·시인
30년 전, 아들은 얻었으니 딸 하나 점지해 달라며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소원이 이루어졌다. 휘영청 밝은 정월 대보름달이 떠오른 날, 아낸 예쁜 딸을 순산했다.
아들은 개구쟁이 짓으로 웃음을 주고, 딸은 조신함으로 기쁨을 주었다. 지인들이 고민하는 사춘기도 모르게 지나가고, 고3 수험생을 둔 학부모의 불편함도 우린 모르고 지나갔다. 30 안팎이던 나이에 오누이가 공동 창업으로 산업 전선에 뛰어들더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딸이 비교적 한가한 겨울철이 되자 일주일간의 금쪽같은 휴가를 만들더니 부모를 모시고 갈 여행계획을 세웠나 보다.
동해 앞바다를 마당으로 둔 펜션에서 일출을 통유리 너머로 맞게 했다. 실내와 실외 욕조에서 거품 목욕을 즐길 수 있게 수발을 들고, 맛집과 전통 시장을 찾아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을 탁자 한가득 올려놓았다. 안반데기에서 별보기, 설악산과 강원도 유적지를 돌아다녔다. 낙산사에선 소원을 비는 글을 적은 리본도 달았다.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이다. 여행도 변변히 못 해 봤던 우릴 위해 휴가를 다 써버린 딸에게 고마움을 넘어 미안하다.
여행을 갔던 기억이 별로 없다 보니 결혼하고 일주일간의 신혼여행이 유일하다. 속박받는 게 싫어서 예약이나 계획도 없이 떠난 신혼여행, 경주, 백암온천을 거처 버스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동해의 짙푸른 바다와 한적한 어촌이 그림 같았다. 두 시간쯤 타고 갔던 버스 여행이 각별했다. 한 시간가량 승객은 우리뿐이었다. 교대로 무릎베개해 주며 미소 짓던 게 아슴푸레하다. 경포대와 설악산을 본 후 쾌속정을 타고 소양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초로다. 그런 추억 여행을 곁들여준 딸의 계획은 감동적이었다.
나는 유일신이나 무속 신앙을 믿지 않는다. 내 의지와 의·과학을 믿는 편이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 당장 죽음이 눈앞에 놓여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보다 더한 역경을 겪은 사람도 많겠지만, 보통 사람보다는 많은 생사의 갈림길을 넘어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넘어져 119 신세를 졌다. 자동차가 폐차될 만큼 사고를 당하고, 3층 건물 외벽공사 중에 떨어지는 사고와 낚시를 하다 테트라포드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 많은 위험에서 살아남아 덤으로 산다는 생각이 삶의 욕심을 덜어냈다.
다시 가벼운 문턱 하날 넘고자 한다. 이틀 후엔 서울대학병원 암 병동 수술대에 누워 있을 것이다. 조기에 발견하여 비교적 가벼운 수술이라지만, 암이라는 글자가 부담으로 떠오르는지 아들은 눈물로 걱정을 삭인다. 며늘아기는 몸에 좋다는 걸 종종 들고 와 엔도르핀을 만들어 준다. 난 의연하다.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아내와 아들 내외, 딸의 계획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하자는 대로 몸뚱이를 내어주고, 그 후는 결과가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행복한 삶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고, 세계 최고의 의술을 가진 나라 아닌가, 옛날로 치면 장수했다. 하늘나라로 먼저 간 벗이 열 손가락을 다 구부려도 남는다.
오늘은 딸 생일, 대보름달이 뜨는 날, 보름달이 떠오르면 마음속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어 보려 한다. 모두의 건강과 낙산사에서 리본에 적었던 코로나 종식과 이 나라를 이끌어갈 능력 있고 바른 지도자가 당선되게 해달라는. 비록 자격이 모자란 사람일지라도 당선 후엔 포용과 능력을 발휘하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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