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연풍-농부의 셈법

by 제주일보

고권일(농업인·삼성학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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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


’농사는 하늘이 반을 짓는다’는 말도, 예외가 아니다. 최선을 다한다 해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일 년 농사 말짱 도루묵이다. 때문에 수확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한 시도 마음 놓아선 안된다.


그런데도, 수확기 다가오면, 농부들의 머리는 셈법으로 분주해진다. 모처럼 만지게 될 목돈으로 무엇을 할까. 오만가지 씀씀이 계획으로 초겨울 밤이 짧다. 여느 해나 마찬가지로‘ ‘예산쟁이 망한다’는 경구(警句)를 놓치는 우(愚)를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올해 노지 ‘황금향’ 농사가 그랬다.


노지 조생온주 출하가격이 마뜩지 않아, 만감류인 황금향으로 ‘고접’을 붙였었다. 첫해에는 궤양병 방제 실패로 품질이 좋지 않았지만, 올해는 관리 노하우를 살려, 맛과 색깔 모두 양호했다. 금상첨화로 시세(時勢)도 괜찮았다. 상인들이 서로 팔아달라고,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농장 왕래가 잦았다.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 올라,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일부는 고객들에게 택배로 판매하고, 나머지는 단골 상인과 계약했다.


그런데 컨테이너까지 갖다 놓고도, 차일피일 수매를 미루었다. 가게에 비축된 감귤이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10여 일이 지났다.


불청객인 늦가을 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열매들이, 단비를 맞아 과육(果肉)을 키우더니, 그렇지 않아도 얇은 과피(果皮)가 터져 땅에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꼭지 부분에 곰팡이가 생겨나, 소비자들에게 내놓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일 년 내내 정성 다한 황금향들이, 하루 아침에 비상품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머릿속 예상했던 수입도 도로아미타불일 수밖에.


상인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고의도 아니고 하늘이 좌우한 일인데, 영세상인 그에게 화풀이를 한들 무엇을 건질 수 있다는 말인가. 경영비로 바친 수업료가 적지 않았지만, 노지 황금향은 수확철 비날씨를 특히 경계해야한다는 농사법 한 꼭지 건진 것으로 만족했다.


그나저나, 이태원 참사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다. 마주 보고 달리는 폭주 기관차처럼 위태로운 정쟁(政爭)의 정치가, 이번 참사를 두고도 확산일로이다. 설상가상 숨죽여 흐느끼던 유족들까지 거리로 나와, 책임자 처벌과 정부여당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며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연민(憐憫)이 상식적 해결을 압도했던 세월호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도지는 것이, 나만의 기우(杞憂)이기를. 미증유(未曾有) 참사의 국민적 아픔이, 제발 지혜롭게 치유되었으면.....


나라 안팎 예측불능의 미래, 추락하는 농산물가격 때문에, 잠 못 드는 촌부(村夫)의 겨울밤이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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