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건과 판례-세상에 둘만 남은 가족

by 제주일보

김정은, 법무법인 결 파트너 변호사


11.jpg


법원에 청구하는 소송은, 주로 상대방과의 주장이 엇갈리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에 대해서 주로 ‘상대방과 싸우는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상대방과의 주장이 엇갈린다고 하더라도 변호사가 하는 일은, 한쪽 당사자를 대신해 ‘재판부를 설득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 상대방과 싸우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보긴 어렵다.



또 법원에 소를 제기하거나 심판 청구 등을 통하여 해결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고, 이런 경우 양 당사자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소송이나 심판 절차에 협력하기도 한다. 이때 변호사들이 필요한 절차들을 진행하며 당사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해결될 수 있게 돕는다.



특히 가족관계가 사실관계와 다르게 제적등본이나 가족관계등록부에 기재된 경우, 이를 정정하려면 법원에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 또는 친생자관계확인의 소 등을 제기해야 하고, 이 경우 양쪽 당사자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소송과정에 협력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제주는 일제강점기에 이어서 4·3사건까지 겪으면서 가족관계 등이 사실과 다르게 기재돼 있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 기재된 가족관계는 단순히 본인의 신고만으로 정정되기는 어려우며 법원의 판결이나 결정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메일이 왔다. 재외국민인 김갑순(가명)씨는 어린시절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 가서 살게 됐는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이을숙(가명)의 이름으로 등록됐다. 이을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을 정도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주변의 도움을 받고 일본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본인은 다시 ‘김갑순’으로 살게 됐다. 그러나 자녀들은 여전히 ‘이을숙’의 자녀로 돼 있었다는 것이다.



생활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자녀 둘 중 한 명이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후, ‘세상에 딸과 나, 둘만 남았다’며 딸의 어머니로 등록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 딸이 원고가 돼 ‘이을숙’을 상대로는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를 구하고 ‘김갑순’을 상대로는 친생자관계확인의 소를 제기해야 한다. 수소문했더니 이을숙은 이미 사망한 것이 확인되어 사망한 이을숙 대신 검사와 모친인 이을숙을 피고로 해 소를 제기했다.



딸인 원고와 김갑순씨, 이을숙씨 모두 국내 마지막 주소지가 제주였기 때문에 제주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했는데, 당사자들이 모두 일본에 있다보니 송달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약 7~8개월이 흐른 최근 첫 재판이 진행됐다.



이런 일들이 많다보니 사건 담당 판사도 ‘원고와 김갑순씨가 진짜 가족이라는 것이죠’라며 상황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상속이 문제된 것이냐’라는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서 ‘특별히 상속 재산은 없는데, 큰아들이 최근에 사망하면서 세상에 둘만 남았다라는 생각에 어렵게 이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답변했고, 감정을 잘 드러내는 법이 없는 판사도 몹시 안타까워하며 ‘하루라도 빨리 정리해야겠다’며 선고기일을 지정했다. 딸은 물론, 소송 후 건강이 악화된 모친도 몹시 기뻐하며 선고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둘만 남은 그들에게 소송이 필요할 뿐 싸움이 필요하진 않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춘하추동-아무리 말이 넘쳐 나는 시대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