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패스 익스프레스를 타고 인터라켄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멋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기차의 고급스러운 별칭에 화답해 주고도 남았다. 상시 장엄한 설산들이 배경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호수와 푸른 들판이 보일 때의 그 삼박자는 매우 조화로웠다. 이따금 졸음이 오기도 했지만 꾹 참고 경치를 즐겼다. 참고로 이 기차는 우측통행이니, 어느 방향으로 가든 오른쪽 창가 좌석에 앉는 것을 추천한다.
10시쯤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바로 역 창구에 가서 융프라우 VIP패스 2일권을 끊은 뒤, 15분 정도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이용하기로 유명한 Backpackers Villa Sonnenhof로 예약했었다. 직원이 체크인 서류를 주었는데, 한국어로 되어 있어서 살짝 놀랬다. 주위를 둘러보니 안내문들에도 한국어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독일어와 영어 그다음으로 많이 적혀있는 언어가 한국어였다. 시간이 일러 짐을 라커에 맡긴 뒤 바로 인터라켄 동역으로 다시 갔다. 홀가분한 몸으로 걸어가는데, 벌써부터 이 도시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산 위로 가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를 잔뜩 품었다.
기차에서 찍은 풍경 사진 | 기차역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처음이었다
인터라켄을 알차게 보려면 예습을 충실히 해야 한다. 워낙 볼 것이 많기 때문에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VIP 패스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게 이틀밖에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스위스로 출발하기 전부터 각 날씨 상황별로 계획을 만들어 놓았다. 인터라켄은 자연을 보러 오는 곳이기 때문에 날씨가 무척 중요하다. 특히 겨울에 오게 되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알프스를 볼 수 있지만, 흐린 날이 많아 제대로 관광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내가 인터라켄에 있던 이틀은 모두 날씨가 좋았다. 하늘에 정말 감사해하며 미리 짜놓았던 플랜 A를 실행에 옮겼다.
아이거 익스프레스를 타고 올라가는 길 | 아이거글렛쳐에서 바라본 알프스
수많은 한국인들과 함께 인터라켄 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그린델발트로 갔다. 곤돌라를 타고 아이거글렛쳐로 간 뒤, 산악열차로 환승하여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다. 곧바로 야외 전망대로 갔다. 그 경치는 정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특히 한쪽은 협곡의 양옆으로 설산들이 늘어져 있어 피오르가 연상되었다. 손과 귀가 시려 오래 머무르진 못했다. 실내로 들어와 VIP패스에 딸려 있는 컵라면을 먹었다. 전역 이후 웬만해선 안 먹던 컵라면이 무척 맛있게 느껴졌을 정도로 눈이 행복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고산병이 도졌다.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체했을 때와 똑같은 증상이라 무척 당황했었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가라앉았다. 진정시킨 뒤 다시 야외 전망대로 가 융프라우의 경치를 실컷 감상하고 클라이네 샤이덱으로 내려왔다.
융프라우요흐에서 바라본 V자곡 | 해발 약 4000m에서 숙성되고 있는 싱글몰트 위스키
알프스까지 왔는데, 기차나 곤돌라만 타고 몸 편하게 감상하기에는 다소 아쉬웠다. 융프라우요흐에서 예상보다 일찍 내려왔기도 해서 다음 역인 벵겐알프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기차가 떠나고 트레킹 길을 찾는 순간 바로 후회되었다. 길 번호도 안 쓰여 있는 데에다 길은 죄다 눈으로 뒤덮여 있어 시작점을 찾을 때부터 애먹었다. 하는 수 없이 직원에게 물어봐서 겨우길을 찾을 수 있었다. 길은 내내 눈밭이었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나 혼자였고, 이따금씩 사람들은 썰매나 스키를 타고 나를 지나쳐 갔다. 처음 절반까지는 막대기가 길 중간중간 꽂혀있어 이를 보고 잘 따라갔다. 내리막길이 미끄러운 것만 조심하면 되었다. 그러나 경치에 한눈팔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길을 잃었다. 구글맵을 켜고 벵겐알프 방향으로 냅다 걸었다. 인도가 아닌 길을 걷다 보니 쌓인 눈이 급격히 깊어졌다. 한 번은 발을 내디뎠는데 눈이 푹 꺼지면서 무릎까지 빠졌었다. 괜히 낭만 찾겠다고 헛고생만 샀다. 그래도 기차나 전망대에서 보는 것과 달리 풍경을 훨씬 생동감 있었다. 보잘것없는 하나의 인간이 거대한 산맥 안에 들어가서 설산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달랐다. 특히 다이아몬드처럼 산에 박혀있는 얼음들이 인상적이었다. 하여간 기어코 벵겐알프 역에 도착하여 스키를 멘 늠름한 스위스 군인들과 같이 기차를 타고 뮈렌으로 갔다.
스키길을 따라 걸으며 바라본 알프스의 모습 | 벵겐알프 역 앞을 지키고 있는 개
기차에서 내리니 어느새 해가 슬슬 지기 시작했다. 뮈렌은 참으로 고요하고 작은 마을이었다. 둘러보기도 전부터 깊은 산속의 평화로운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천천히 걸으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배고파서 마트에서 바나나 한 송이를 사 먹으며, 개를 산책하는 주민들,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하나둘씩 전등이 켜지는 목조 주택들을 구경했다. 동네가 너무 작아 30분 만에 한 바퀴를 다 돌았다. 기차가 오기까지 한참 남았는데, 마을에서 딱히 더 할 것이 없어서 다음 역까지 걸어갔다. 30분 남짓 절벽길을 따라 걸었다. 해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마침 빈터렉 역이 보였다. 거의 아무도 없는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 무사히 동역으로 돌아왔다.
알프스를 등지고 평화롭게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 | 산속의 작은 마을 뮈렌
인터라켄 동역 맞은편에는 Coop이라는 수퍼마켓이 있다. 모든 관광객이 이곳에서 식재료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간다. 스위스 답게 가격대가 사악했다. 결국 바나나와 냉동 피자 1판만 샀다. 숙소에 가서 체크인을 완료한 후 피자를 들고 주방으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인이 과반수였다. 거의 대부분이 무리를 지어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오븐을 하나 차지한 뒤 피자를 데우기 시작했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또래 두 남자가 같이 저녁 먹지 않겠냐며 제안했다. 외로웠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좋다고 했다. 그들이 들고 온 음식을 보니 무려 삼겹살에 라면이었다. 음식을 너무 많이 사 와서 남을 것 같아 같이 먹자 제안했다고 한다. 나야 너무 고마웠다. 바로 팔을 걷고 나서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이는 것을 열심히 도왔다. 거지 여행을 하다 얼떨결에 포식하게 되어서 행복은 배가되었다. 먹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분들은 이 날 인터라켄에 도착했다고 해서, 내가 다녔던 동선을 쭉 읊어주었다. 또 전문가의 위용을 뽐내며 뮌헨 맥주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주었다. 한국인이 많이 숙박하는 덕분에 서로 도움도 받고 재미도 있어서 좋았다. 다음날도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하고 헤어졌다.
추위에 벌벌 떨며 애타게 기다리던 열차 | 두 의인이 없었다면 쓸쓸히 피자만 먹었겠지
둘째 날
이젠트발트 - 피르스트 - 멘리헨 - 벵겐 - 슈타우프바흐 폭포
여유롭게 일어나 빵과 시리얼로 느긋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전날과 다르게 구름이 가득했고, 길가는 살짝 촉촉했다. 일기예보를 통해 정오쯤 되면 날이 맑아질 거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선 이젠트발트라는 곳에 가기로 했다. 브리엔츠 호수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매우 유명하다. 어머니 어깨너머로 스쳐본 것이 전부였지만, 괜히 이곳을 촬영지로 선정하진 않았을 거라 믿고 한국인들을 따라 버스를 타고 갔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에서 바라본 호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날씨가 흐린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알프스와 맑은 호수는 여전히 환상의 궁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T자 모양의 목재 부두가 밋밋함을 덜어주고 감성을 더해주었다. 이곳에는 한국인들만 있었는데, 이미 사진 구도를 다 파악해 온 듯했다. 그들이 찍는 것을 구경한 뒤, 그대로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서 구름이 걷히고 빛이 도래하고 있다 | 언덕에서 내려다본 이젠트발트
인터라켄으로 돌아오니 다행히 날은 개어 있었다. 계획대로 피르스트로 향했다. 그린델발트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다시 날씨가 흐려지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하지만 점점 올라갈수록 구름에 가려져 있던 산꼭대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정상에서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설산들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조금만 절벽을 타고 쭉 이어진 Cliff walk 위를 걷고 난간 전망대에서 산맥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사진도 찍었다. VIP 패스에 무료 액티비티가 하나 포함되어 있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글라이더를 타보았다. 엎드린 채로 매달린 짚라인이었는데, 설산을 위에서 볼 수 있어 신기했으나 스릴은 없었다.
Cliff walk를 걸을 때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심연의 낭떠러지가 보인다 | 난간 위에 당당히 서 있는 나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 멘리헨으로 갔다. 10인승 곤돌라에 혼자 타게 되었다. 너무 심심해서 아름다운 풍경에 맞서 당시 빠져있던 김동률 노래를 마음껏 불러보았다. 피르스트는 절벽에서 바라보는 알프스의 민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면, 멘리헨은 하얀 들판 한가운데에서 360도가 알프스로 둘러싸여 있는 기분을 주었다. 그 많은 절경 중에서도 가장 멋있다고 알려진 왕관 전망대로 올라갔다. 오르막길이 가파른 데에다가, 길이 너무 미끄럽기까지 해서 오르는 데 제법 애먹었다. 그래도 끝까지 올라 일자로 정렬된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3형제가 반겨주었다. 구름이 꼭대기에 살포시 앉아있었지만, 그 실루엣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이 글 커버 이미지가 바로 그 융프라우 3봉이다. 눈길을 걸어 올라간 고생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고 천천히 내려왔다. 넘어지진 않았으나 깊숙한 눈밭에 발을 잘못 디뎌 또 신발이 젖어 버렸다. 이후 벵겐과 라우트브루넨을 슬쩍 훑어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멋들어진 전망치고 한적했던 멘리헨 전망대 | 멀찍이 보이는 왕관 전망대를 향해 꿋꿋이 올라갔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역시 Coop에 들렀다. 이날은 소박하게 먹기로 해서, 유통기한이 임박해서 할인하는 슈니첼과 부어스트만 사갔다. 전날 같이 저녁을 먹었던 형들과 같이 나눠 먹으며 하루 동안 다녔던 곳들을 공유하고 헤어졌다. 내가 전날 말해주었던 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척 뿌듯했다.
셋째 날
기존 계획은 8시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로 가는 것이었지만, 마터호른이 곧 체르마트이고 체르마트가 곧 마터호른이라는 말에 9시 30분으로 미뤘다. 기차를 2번 환승하여—슈피츠와 비스프—정오쯤 도착했다.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하늘은 매우 흐렸다. 바로 밀라노로 넘어갈까 고민되었다. 그래도 전날처럼 산꼭대기는 잘 보일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키르히다리로 갔다. 역시 마터호른의 실루엣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직접 높이 올라가면 보이지 않을까 해서 20여 분을 걸어 마터호른 전망대로 올라갔다. 그러나 다른 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산 중턱마저 보이지 않고 뿌연 구름과 산 밑동만 볼 수 있었다. 산악열차를 타고라도 올라가 볼까도 했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 깔끔히 포기했다. 그래도 인터라켄에 있었던 이틀간 날씨가 좋았으니 미련은 없었다. 2시간 정도 마을을 거닐다, 5달 만에 아버지를 뵈러 밀라노행 기차에 올라탔다.
체르마트의 귀여운 택시 | 심심찮게 한글을 본 것으로 한국에서 스위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 하늘을 온통 메워버린 구름
자연으로 시작해서 자연으로 끝난 여행이었다. 그러다 보니 날씨 운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여행지라 생각한다. 그런데 스위스의 겨울은 날씨가 많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많다. 따라서 겨울 스포츠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겨울 스위스 여행은 추천하지 않는다. 이틀 동안 온전히 인터라켄을 감상할 수 있었음에, 조상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가족 여행 때까지 이 기운이 이어지길 매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