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에는 해가 다 지고 도착했다. 기차역은 꽤나 컸는데, 내부홀 건물이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져 고풍스러웠던 점이 인상 깊었다. 여태 갔었던 다른 나라들보다 범죄도 많고 소매치기도 잦을 거 같아 사주경계를 하며 곧장 숙소로 갔다. 도미토리에 짐을 풀고 바로 아버지께 연락을 드렸다. 상황이 애매해서 저녁은 각자 먹고 다음날 코모 호수에서 만나기로 했다. 저녁을 얻어먹지 못해 조금은 아쉬워하며, 호스텔 웰컴 드링크와 감자칩으로 허기를 달랬다.
밀라노로 가는 길에 지나친 코모 호수 | 신구 조화가 제법 어울리는 밀라노 중앙역
둘째 날
코모 - 벨라지오
총 5명의 전현직 교사로 이루어진 아버지 일행은 보름 동안 돌로미티 트래킹을 위해 이탈리아에 왔었다. 그 여행의 마지막을 밀라노에서 쉬면서 이틀 정도 보내고 귀국하실 예정이었다. 밀라노에서는 트래킹을 하지 않는 것 말고는 계획이 딱히 없으시다길래 나랑 겹치는 기간에 같이 코모 호수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드렸다. 이 여행을 계획할 당시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마침 다 읽은 때였는데, 마빈이 휴양을 위해 다녀왔던 코모 호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분들은 전날 밀라노 시내를 돌고, 이날 코모 호수에 나랑 같이 다녀오기로 정했다.
늦잠을 자고 싶어 아버지 일행보다 1시간 늦게 코모에 갔다. 그동안 이분들은 호수 주위를 산책하며 경치를 감상하셨다. 나는 역에서 나오자마자 무한도전 동상을 지나 곧장 아버지 일행이 계신 카페로 갔다. 4개월 남짓만에 아버지를 처음 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뵙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군 복무 시절에도 4개월을 넘긴 적은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과도 인사를 나눈 뒤,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교환학생 생활에 대해 궁금해하실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청춘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가장 관심이 큰 듯했다. 이후 서로 여행 이야기를 하다 벨라지오행 페리를 타러 선착장으로 갔다.
페리에 타고는 아버지랑 단 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께서는 낯선 타지에서 부자가 상봉한 기분이 신기하다 하셨지만, 유럽이 익숙해진 내게는 군 복무 시절 첫 휴가 때에 비해면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난주 동아리 친구가 내 방에 놀러 왔던 것이 그렇게 만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선생님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벨라지오에 가는 페리는 중간중간 작은 마을들을 들렀다. 그중 첫 번째 마을인 Tavernola에서 잠시 정박한 동안, 한 선생님은 벌써 벨라지오에 도착한 줄 알고 내려 버리셨다. 왜 아무도 안 내렸는지 의아해하시던 때, 배는 이미 출발해 버렸다. 우리는 창을 통해 그 선생님의 벙찐 얼굴을 아주 생생히 볼 수 있었다. 하필 영어를 잘 못하는 국어 선생님이어서 꽤 난감했다. 일단 바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정리한 후에 벨라지오로 가는 다른 배를 구할 수 있도록 통역해 주었다. 정말 다행히도, 곧바로 다음 배가 있었고 현금도 가지고 계셔서 우리보다 1시간 늦지만 어쨌든 벨라지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코모 역 바로 앞에 있는 무한도전 동상 | 단층에 대해 지질 선생님이 상세히 설명해 주셨지만 눈 깜빡할 새에 잊어버렸다
뱃바람을 쐬며 에메랄드 빛의—석회 때문이라는 것 또한 지리 선생님이 알려주셨다—광활한 호수를 감상하다 보니 금방 벨라지오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13시가 훨씬 넘어있었다. 1월임에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아기자기한 마을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점심을 먹을 곳을 찾다 보니 낙오되었던 선생님도 무사히 도착하셨다. 바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La Dolce Vita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스위스에서 음식을 마음대로 사 먹지 못했던 서러움을 이번 단 한 끼로 해소할 수 있었다. 가격대가 꽤 나갔지만, 먹고 싶은 것을 고루고루 시켰다. 피자와 트러플 파스타, 오소부코 리조또에 맥주도 각자 2잔이나 마셨다. 역시 어르신들이랑 다니니 내게 떨어지는 게 많았다. 깍듯이 모시며 행동으로나마 보답하려고 노력했다. 이 점심이 이번 여행의 처음이자 마지막 외식이었다 보니 다소 감격스러웠다.
조촐한 벨라지오 정박장 | 오소부코는 우리나라 갈비 맛이 나서 오히려 기대 이하였다
237유로라는 큰돈을 지불한 것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소화도 시킬 겸 동네 산책을 하다 전망대에 가서 아저씨 냄새가 흠씬 풍기는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후 C30번 버스를 타고 코모로 돌아갔는데, 낮술의 영향인지 버스에 타자마자 모두가 기절해 버렸다. 다행히 한 명이 일찍 깬 덕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고, 모두 머리가 띵한 상태로 밀라노행 기차에 올라탔다.
알프스가 보이는 Punta Spartivento 전망대 | 벨라지오의 한 골목
아버지 숙소에 가서 선생님들께 독일 dm에서 사 온 비타민을 하나씩 드리고, 아버지랑 같이 나와 새 숙소로 이동했다. 저녁을 먹기에는 애매해서 슈퍼마켓에서 맥주와 과자를 사 와 아버지와 단둘이 뒤풀이를 했다. 표정만 봐도 아까보다 아버지가 무척 편해하신 듯했다. 그 무리에서 막내셨던 터라 그동안 눈치를 많이 보셨을 것 같았다. 하여간 편하게 맥주를 마시며 오래간만에 부자간 진솔한 대화를 나누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귀국 전날 내게 호화로운 당일치기를 선사해 준 선생님들이 참으로 고마웠다.
셋째 날
산마르코 교회 - 스포르체스코 성 - 개구리의 회랑 - 밀라노 대성당 - Naviglio Grande
6시에 일어나서 눈곱도 떼지 못한 채 패딩만 걸치고 나왔다. 어둑어둑한 하늘과 찬 공기에 짓눌린 채로 캐리어를 끌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아버지의 부지런한 성격 때문에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했다. 30분 가까이 가만히 서서 새벽바람을 쐬며 나머지 일행 분들을 기다렸다. 잘 돌아가시라고 배웅해 드리고 혼자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왔다. 오히려 워낙 피곤했기 때문에, 밀라노의 외딴 골목이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찬 바람을 너무 오래 맞아서일까, 몸은 피곤했지만 도통 잠에 들지는 못했다. 그렇게 침대 속에서 몸을 뒤척이다 보니 어느새 9시가 되어 있었다. 찝찝하게 일어나 숙소에 비치되어 있는 과자들로 배를 채우고 최대한 늦게 체크아웃을 했다.
새벽과 다르게 날은 제법 온화해졌다. 독일과는 다르게 이탈리아에서는 겨울에도 따스한 햇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점이 참 부러웠다. Bounce 어플로 내 캐리어를 맡긴 후, 배낭만 메고—5유로라도 아끼기 위한 선택이었다—밀라노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우선 스포르체스코 성을 가려고 했는데, 가던 도중 무슨 행사가 열린 것을 보고 잠깐 둘러보았다. 산마르코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분위기는 다소 엄숙했다. 알고 보니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관을 운구하기 전에 신부가 중앙에서 빵 쪼가리를 나누어 주길래 나도 슬쩍 줄을 서서 받아먹었다. 예수의 피와 육신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빵은 아닐 텐데, 왜 빵을 나눠 먹는 것인지 궁금했다.
관이 교회를 떠나자 나도 함께 밖으로 나와 원래 목적지로 향했다. 스포르체스코 성으로 가면서 건물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중앙역에서 멀어질수록 연식이 오래된 듯했다. 중앙역에서 보면 역 건물을 제외하고는 신식 고층 빌딩들이 많았는데, 벗어날수록 익숙한 저층 건물들이 늘어났다. 밀라노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도시라는 준세이의 말에 크게 공감되었다. 여전히 과거를 품고 있다는 피렌체에 가게 될 2월 가족 여행이 더욱 기대되었다.
장례식이 열리고 있는 산마르코 교회 | 스포르체스코 성 내부 전경
스포르체스코 성 자체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성들을 몇 달간 워낙 많이 봐왔던 터라 시시했다. 이 성과 연결된 공원을 사람 구경을 하면서 천천히 가로질러 Arco della Pace에 도착했다. 대단히 특색 있지는 않은 개선문이 중앙에 자리 잡은 광장이었는데, 그답게 시민들이 와서 평화롭게 놀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터라 가운데 개선문이 있는 배경을 등지는 명당자리에서 버스킹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라는 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최후의 만찬 진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몇 달 전에 예약해야 겨우 볼 수 있다고 한다. 미술에 관심 하나 없는 나는 이 사실을 2주도 안 남았을 때에 알았고, 당연히 그 걸작을 볼 수 없었다. 이슬람 건축 양식이 살짝 섞여 보이는 독특한 외형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바로 옆에 있는 개구리의 회랑으로 갔다. 구글맵 리뷰 수가 그 성당의 약 1/1000인 17개밖에 안 되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성당보다 더 흥미를 끈 곳이었다. 바로 이곳이 아오이가 심심하면 바람을 쐬러 오는 곳이었다. 옛날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갔을 때에는 회랑 입구들을 전부 막아놓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연못 중앙을 바라보며 외롭게 울고 있는 돌개구리 4마리를—크기가 생각보다 작아서 놀랐다—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매우 아쉬웠다.
평화로운 Arco della Pace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와 맞닿아 있는 개구리의 회랑
그다음 드디어 가장 유명한 밀라노 대성당으로 갔다. 사실 성당의 크기보다는 성당 앞 광장의 북적거리는 인파에 압도당했다. 대단히 높지는 않았지만 단면이 넙데데하고 장식은 화려했다. 하얀 대리석으로만 지어졌음에도 세밀하게 깎아 놓아 눈이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검게 그을렸고 위로 솟구쳐 있는 쾰른 대성당과 대조적이면서도, 섬세한 장식은 매우 닮아 있었다. 성당에 입장하기 전 젤라또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했다. 맛차와 슈트루델, 피스타치오 3가지 맛을 선택했는데, 역시 피스타치오가 근본이었다. 맛차도 마음에 들었으나, 슈트루델은 너무 달기만 해서 실망스러웠다. 전망대 입장이 포함되지 않은 5유로짜리 입장권으로 밀라노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예술 작품들을 스쳐보고 박물관을 나와 성당 내부를 구경했다. 큰 기둥들 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요소들은 딱히 없었다
산 로렌초 원주를 지나 경치가 예쁜 Naviglio Grande로 갔다. 강을 통해 나가는 배들을 위한 부두인데, 코펜하겐에서 봤던 뉘하운과 비슷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다리가 놓아져 있어 지그재그로 걸어 다니며 둘러보았다. 마침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가 강물에 비치니 주위 돌담과 건물들에 무척 잘 어울렸다.
밀라노 대성당과 그 앞 광장 | 밀라노에서 영화 비포 시리즈를 찍는다면 이곳을 거니는 장면이 무조건 포함되었을 것이다
남쪽으로 내려온 만큼 밀라노 중앙역까지 다시 걸어 올라왔다. 점점 피로가 가중되어 배낭의 무게 점점 크게 느껴졌다. 캐리어를 되찾고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남았는데, 부푼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끄니 문득 부랑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상보다 버스 터미널에 일찍 도착해서 뮌헨행 야간버스를 타기까지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하필 이 버스가 연착하여 2시간이나 추가로 기다리게 되었다. 겨울밤이 이슥했는데도 버스 터미널에 히터마저 틀어져 있지 않아 무척 추웠다. 여기에 하필 의자마저도, 앉으면 엉덩이가 아픈 철제 의자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날이 46,111보나 걸은 날이었기 때문에—교환학생 시절 중 가장 많이 걸었다—, 모로코 페스 공항에서 노숙할 때보다도 더 힘들게 느껴졌다. 기어코 야간버스에 탔을 때 내 옆자리에 아무도 없어 발밑에 가방을 놓지 않아도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야릇함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나는 멀리서 구경만 하고 먹진 않았다 | 낮보다는 밤에 더 아름다운 스포르체스코 성
다시 돌아온 독일은 이탈리아만큼 따뜻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으레 그랬듯 라면을 끓여 호호 불어 먹었다. 닷새 뒤에 어머니와 여동생과 다시 따뜻한 이탈리아에 가서 비싼 음식을 먹을 것을 고대하며, 친구들과 함께 독일 겨울의 찬바람을 버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