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에서 야간 버스를 12시간 가까이 탄 끝에 로마에 도착했다. 부담감 때문인지, 여태 자주 타왔던 야간 버스들보다 유독 더 힘들었다. 시간이 많이 남아 시내에 있는 숙소까지 대중교통을 타지 않고 한참을 걸어갔다. 1시간 남짓 걸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단 2분 거리에 이렇게 크고 화려한 성당이 있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숙소를 참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크인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숙소에 들어가기에 앞서 점심을 먹을 식당에 들어갔다. 구글맵으로 물색하던 중 PINSALLEGRA라는 피자집의 평점이 매우 좋길래 바로 결정했다. 아직 정오가 안 되어서 그런가 예상과는 다르게 손님이 나 혼자였다. 현지 이탈리아인처럼 Peperoni 'nduja라는 6.5유로짜리 피자 한 판을 혼자 시켜 다 먹었다. 토핑이 듬뿍 쌓여있고 도우가 두툼한 우리나라 피자와 달리 얌전하고 초라한 피자였다. 하지만 맛은 좋았다. 대단히 맛있다는 아니지만, 바삭한 도우가 적절히 들어있는 토핑과 잘 어울렸다. 맥주와 함께 야식으로 딱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 살 넘은 건물들이 도시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 기본에만 충실한 이탈리아 피자
숙소에 들어가서 짐만 놓고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과 스페인 계단 등을 답사하였다. 계단과 오르막길을 오르니 겨우 경량 패딩만 걸쳤음에도 땀이 났다. 겨울임에도 온화한 이탈리아의 날씨도 한몫했다. 패딩을 벗어 허리에 맨 채로 핀초 언덕과 보르게세 공원을 산책했다. 겉옷 없이 햇볕을 쐬며 거닌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이탈리아의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푹 쉬었다. 쪽잠을 자고 일어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아침에 먹을 시리얼과 우유, 빵, 저녁으로 먹을 고기, 맥주와 과자 등을 사 왔다. 이탈리아 물가가 싸다고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뮌헨보다 비싸서 깜짝 놀랐다.
Terrazza Viale del Belvedere에서 바라본 로마 전경 | 핀초 언덕에 있던 고라스 형님의 흉상
저녁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고 마중을 나가러 공항버스를 타고 다빈치 공항으로 갔다. 30여 분을 기다리니 한국인들이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어머니와 여동생이 캐리어를 끌고 나왔다. 미리 뮌헨에서 얼렁뚱땅 만들어온 피켓을 흔들며 그녀들을 맞이했다. 유럽 여행의 설렘을 가슴 한가득 품고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하며 공항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혼자 숙소에 있을 때까지는 이번 여행을 사고 없이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지만, 어머니가 오시니 심리적 안정감이 생겨 자신감이 생겼다.
삼겹살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던 논필터 Peroni 맥주 | 집 앞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둘째 날
바티칸 미술관 - 시스티나 성당 - 성 베드로 대성전 - 성 천사의 다리
8시 40분에 시작되는 바티칸 투어 때문에 7시에 일어나서 급히 준비했다. 바티칸이라는 나름의 국가에 입국한 뒤, 우선 미술관 로비에서 1시간 정도는 앉아서 설명을 들었다. 시스티나 성당 안에서는 가이드의 설명이 금지되어 있기—정숙해야 하며 사진 촬영도 금지된 공간이다—때문이었다.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는데, 미술에 관심 없는 나의 흥미를 끌 정도로 재밌는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설명이 끝나고 미술관과 정원을 돌아다니며 몇몇 작품들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라오콘 군상'과 '예수의 매장'을 직접 보니 더 깊이 빠져 감상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각 성자들의 도상이었다. 성 베드로는 두 열쇠, 사도 바울은 큰 칼, 성 프란치스코는 못자국 등 이제는 기독교 그림을 감상할 때 아는 척을 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지식이었다. 이후 시스티나 성당에서 '천장화'를 감상하며 생긴 목의 뻐근함으로 미켈란젤로의 생고생에 경의를 표했다.
투어의 마지막으로 성 베드로 성당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이유가 참 단순했다; 교황의 나라에 있는 성당이 가장 크고 화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더 크게 지으면 성당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 내부 또한 웅장했고 그만큼 화려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처럼 화려하게 금칠되어 있었는데, 그 중앙에 높게 우뚝 서 있는 검은 성궤가 킥이었다. 이후 입장권을 구매하기 위해 1시간 정도 줄을 선 끝에 전망대에 올라갔다. 줄을 서서 기다릴 때는 가만히 서 있는 대로 힘들었고, 지루한 기다림이 끝나고 출발할 때는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힘들었다. 하늘이 흐려 투자한 돈과 시간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열쇠 구멍 모양의 성 베드로 광장과 이를 둘러싼 로마의 전경은 장엄했다.
동생이 찍은 아테네 학당 시그니처 사진 | 성 베드로 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본 성 베드로 광장 전경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동생이 매우 지쳐 보였다. 바로 구글맵으로 식당을 찾아보았다. 바티칸에서 멀지 않으면서 평점이 무난했던 La Vittoria로 갔다. 피자 2판과 맥주를 시켜 먹었다. 전날 먹었던 피자보다는 토핑이 많이 들어가 있었지만, 건성으로 뿌려져 있던 것은 그대로 닮았다. 그래도 맛은 맛있었다. 피자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느낀 점인데, 피자는 도우가 얇을수록 맥주랑 어울리는 것 같다. 밥을 배불리 먹었지만, 디저트 배는 여전히 배고파하는 것 같았다. 이탈리아에 온 것은 귀신 같이 눈치채 가지고, 젤라또를 내놓아라 구걸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로마의 3대 젤라또 중 하나인 올드브릿지 젤라또에 가서 입가심했다. 작은 점포가 손님들, 사실상 한국인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예상가는 달달한 맛에 행복해졌다. 그러나 솔직히 밀라노의 아무 점포에서 먹었던 젤라또와 큰 차이를 느끼진 못했다.
젤라또를 야금야금 녹여 먹으며 숙소로 천천히 돌아왔다. 사실 성천사성을 보는 것도 계획해 두었으나, 어머니와 여동생이 무척 피곤해 보여서 취소했다.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런 듯했다. 대신 성 천사의 다리까지만 가서 분홍빛 하늘과 하나둘 켜지는 조명을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배고팠던 나만 저녁으로 과자와 맥주를 먹은 뒤, 일찍 일어날 다음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일찍 자러 들어갔다.
토핑이 건성건성 올려진 만큼 맛있는 이탈리아 피자 | 테베레 강과 성 천사의 다리
셋째 날
폼페이 고고학 공원 - 소렌토 전망대 - 아말피 코스트 - 포지타노
전날 바티칸 투어를 들으러 8시 40분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탈리아 남부 투어의 집합 시간은 무려 6시 30분이었다. 그래도 전날 일찍 자둔 덕에 늦지 않게 일어나 딱 맞추어 버스에 올라탔다. 첫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는 푹 잤다. 이후 폼페이로 가는 길부터 가이드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우리는 이번에 박재벌 가이드의 이탈리아 남부투어를 신청했다. 이탈리아 남부 투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동시에 가장 특이하다길래 신청해 보았다. 겉모습은 털이 수북해 거칠어 보였지만, 실은 매우 곰살궂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10년이 넘는 경력에서 나오는 연륜이 청산유수처럼 술술 나오는 말에 묻어 나왔다. 더구나 설명이 다른 가이드들에 비해 지루하지 않았다. 폼페이에 도착한 뒤, 먼저 원형극장으로 갔다. 이곳이 소리가 잘 울리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가이드는 직접 아리랑도 불렀다. 소리가 울리는 것도 신기했지만, 웬만한 가수 이상의 성량을 보여준 것에 더 크게 놀랐다. 그다음 폼페이 이것 저곳을 돌아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2천여 년 전에는 잘 나갔던 도시인만큼 상상 이상으로 많은 시설들을 갖추었다. 마차의 말을 묶어두는 돌, 하수시설, 공중목욕탕 등 상상 이상으로 많은 시설들이 2천 년 전부터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사창가도 번창했었는데, 조각과 그림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워낙 인상적이었다.
잠깐 들른 휴게소에서 찍은 새벽하늘 | 저 자리에서 설명을 마치고 아리랑을 불러주었다 | 2천 년 전치고 깔끔하게 닦인 도로
투어에 포함되어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갔다. 우선 소렌토 전망대에 내려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늘 그래왔듯 지중해는 정말 푸르고 드넓었다. 운 좋게 날씨까지 좋아 겨울인 것이 무색하게 아름다웠다. 가이드가 나누어준 레몬 슬러시를 먹으며 경치를 감상한 뒤, 아말피 코스트를 거쳐 포지타노로 갔다. 레몬 기념품점에서 레몬 맥주를 한 모금씩 시음한 뒤, 1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가졌다. 이탈리아 남부가 시큼하면서도 단 레몬이 유명하기 때문에 레몬으로 만든 식품들이 많았다. 레몬 맥주와 레몬 샤벳을 사들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Radler보다 덜 신 대신 보리맛이 은연히 나서 나쁘지 않았다. 물론 맥주 코너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나로서는, 평소라면 그 돈으로 일반 맥주를 사 먹었을 것이다. 비타민C를 충분히 충전한 뒤, 해변으로 내려갔다. 겨울이라 그런지 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래에서 층층이 쌓여있는 주택들을 감상한 후 버스에 올라탔다.
3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로마로 올라왔다. 그동안 가이드가 여러 맛집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중 Osteria Emasi에 갔다. 트러플 봉골레 파스타, 트러플 라비올리, 발사믹 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다. 조개 향이 트러플 향을 잡아먹은 것 빼고는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나쁘지 않은 가격에 고급 요리들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았다.
소렌토 전망대 | 포지타노 해변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주민들이 부러웠다 | 우리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다
넷째 날
진실의 입 - 키르쿠스 막시무스 - 콜로세움 - 조국의 제단 - 판테온 - 트레비 분수 - 스페인 계단 -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이틀 동안 매우 고달픈 일정을 소화했기 때문에 이날은 8시에 나름 느긋하게 일어났다. 사흘 전 사 둔 등심을 구워 먹고 또 카페에 가서 티라미수를 먹으며 배부르게 하루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진실의 입에 갔다. 유명한 포토 스팟인 만큼,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다. 시설 관리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계속 재촉했다. 30분 정도 기다리면서 미리 자세를 생각해 놓았다. 우리 차례가 오자 일사불란하게 오드리 헵번처럼 입 안에 손을 자세를 취하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나왔다. 그다음 넓은 키르쿠스 막시무스를 지나 콜로세움으로 갔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남겨져 있는 성의 터 | 다소 흐리멍덩한 진실의 입
콜로세움은 가장 유명한 유적지인 만큼 매우 붐볐다. 특이했던 점이라면, 바티칸에 비해 중국인의 비율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이다. 바티칸은 종교 작품이 주인 관광지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학구열이 높은 우리나라 사람이 많다고 한다. 콜로세움 내부 역시 사람들로 꽉 찼다. 그 때문에 사진이 잘 찍히는 난간을 차지하기란 무척 어려웠다. 웅장한 외부와는 다르게 내부는 밑천이 드러난 모습이었다. 관중석은 거의 다 없어졌고, 바닥도 다 드러나 위에서 지하 2층까지 바닥을 볼 수 있었다. 다행히 하늘은 무척 맑았다. 덕분에 적갈색 건축물들이 두드러져, 콜로세움 전체가 보이도록 찍은 사진이 아주 잘 나왔다.
샅샅이 발골된 콜로세움의 내부 | 그동안 겪어온 세월의 풍파를 여실히 보여주는 콜로세움의 비대칭
수많은 사람들에 치어 피곤해진 우리는 포로 로마노는 건너뛰고 일단 판테온 근처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좁은 골목에 있는 Achille Al Pantheon di Habana라는 식당에서 까르보나라와 소꼬리찜 파스타를 먹었다. 가이드가 추천해 준 식당이라 그런지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많았다. 계란으로만 만든 순정 까르보나라가 내게는 신기했는데, 크림과는 또 다른 꾸덕한 것이 내 입맛에 맞지는 않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판테온에 들어갔다. 5유로나 내고 들어갔으나 볼 게 많지 않아 돈이 아까웠다. 또 다른 로마 3대 젤라또인 지올리띠 젤라또에 갔다. 올드브릿지와는 정반대로 규모가 크고 내부도 고급스러웠다. 물론 맛은 아는 그 맛이었다. 이때까지 이탈리아에서 젤라또를 3번 먹었는데, 피스타치오 맛은 절대 빼놓지 않았다. 무슨 맛을 고를지 고민될 때 피스타치오만한 든든한 맛이 또 없기 때문이었다.
웅장한 판테온의 모습 | 로마 3대 젤라또 중 하나인 지올리띠
당을 충전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느긋하게 트레비 분수에 갔는데, 분수 앞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동전을 던지기조차 힘들 정도였지만, 우리 모두 기어코 동전을 던졌다. 잠시 자리를 잡아 앉아 멍하니 분수를—시야에 사람이 차지하는 면적이 훨씬 크긴 했다—구경하다 이동했다. 스페인 광장에 가는 길에 가이드가 알려준 유명한 트러플 전문점 La Bottega del Tartufo에 잠깐 들렀다. 교환학생을 온 이후 파스타를 자주 해 먹게 되었으니, 앞으로 트러플오일파스타를 자주 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겨 화이트 트러플 오일을 한 병 샀다. 스페인 광장에 도착해서는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사진을 찍었다. 중간중간 앉아있다 경찰의 지적에 일어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 사람들로 빼곡한 광장을 구경하다 숙소로 되돌아왔다.
잠깐 쉬다가 아직 배가 덜 고파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들르기로 했다. 무슨 행사가 진행되길래—엄숙했던 분위기로 보아 장례식으로 사료된다—배고파질 때까지 감상했다. 저녁은 숙소 바로 옆 Birreria Marconi에서 먹었다. 구글맵 리뷰에서 봤던 가성비가 매우 뛰어난 식당이었다. 라자냐와 버섯 리조또, 양꼬치를 안주로 기네스를 마셨다. 탭에서 따른 기네스는 정말 부드러워 감탄하면서 마셨다. 음식들도 모두 괜찮았는데, 특히 버섯 리조또가 정말 맛있었다.
사람들로 빼곡한 스페인 광장 | 정말 만족스러웠던 숙소 코앞 맛집
로마의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이곳이 유럽 문명의 요람이라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2천 년이 넘은 유적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건물들 사이에 볼품없이 있기도 했고, 한데 모아져 웅장하기도 했다. 전쟁으로 문화유산들이 손실된 우리나라와 달리 오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참으로 부러웠다.
다행히 나흘 동안은 별 탈 없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처음에는 피곤해했지만, 그래도 금방 유럽에 적응한 거 같아 다행이었다. 숙소도 난방이 잘 안 되어 잘 때 추운 것 빼고는 만족스러웠다. 남은 피렌체와 파리 여행에 대한 걱정은 싹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