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가죽시장 - 피렌체 대성당 - 시뇨리아 광장 - 베키오 다리 - 미켈란젤로 광장
나흘밤을 묵으며 정들었던 숙소를 떠나 테르미니 역으로 갔다. 피렌체행 기차가 10여 분 지연된 것이 꼭 DB를 연상시켰지만, 더 늦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만을 갖지 않기로 했다. 피렌체의 새 숙소는 더 좋았다. 널찍한 거실에 퀸 사이즈 침대가 있는 안방, 게다가 싱글 침대 2개가 있는 다락방까지 있었다. 아울러 화장실도 2개나 있었고 주방도 훨씬 넓어 돌아다니기 수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방이 빵빵했다. 로마에서는 이불을 꽁꽁 뒤집어쓰고 자야 했는데, 이곳은 이불을 걷어 차고 자도 될 만큼 푸근했다.
숙소에 가서 에어비엔비 주인과 접선하여 짐만 구석에 놔둔 뒤, 바로 생 로렌초 성당과 가죽시장을 둘러보러 나왔다. 로마처럼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반대로 밀라노처럼 현대적인 면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피렌체의 모든 건물들은 통일되게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준세이가 왜 이곳에 계속 남아서 아오이와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간직했는지 납득시켰다. 그런 분위기 덕분에 로마보다 위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따뜻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피렌체 대성당, 두오모가 항상 있었다. 이 거대한 두오모의 가호를 받는 피렌체는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점심 예약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가죽시장에 먼저 가보았다. 방금 열심히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대해 끄적였지만, 사실 가죽시장은 피렌체스럽지 않았다. 대신 가보지도 않은 인도의 느낌이 날 정도로 좁고 호객행위도 심했다. 한국인들이 워낙 많이 와서 그런지 한국어를 제법 하는 상인들이 종종 보였다. 동생은 가죽시장에서 160유로짜리 숄더백을 하나 샀다. 제대로 된 가격에 좋은 품질의 가방을 산 것인지 관심도 판별할 방법도 없지만, 동생이 스스로 잘 판단해서 샀을 거라 믿는다.
점심은 달오스떼에서 티본스테이크를 먹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피렌체가 티본스테이크로 유명해, 로마의 젤라또처럼 피렌체에도 3대 티본스테이크가 있었다. 우리는 그중 하나인 달오스떼를 선택했다. The Fork 어플로 예매하면 할인을 받아 과하지 않은 가격에 티본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와인과 구운 채소, 토마토 칠리 파스타와 함께 티본스테이크 1.2kg를 주문했다. 파스타는 가격 거품이 조금 있는 듯했지만, 나머지는 그만한 값어치를 했다. 특히 티본스테이크가 간도 적당했고 딱 알맞게 구워져서 정말 부드러워 왜 유명한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뿌듯하게 133유로를 결제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정비를 마치고 다시 외출했다. 미리 끊어 놓은 3일짜리 Brunelleschi Pass를 이용하여 피렌체 대성당의 꼭대기, 쿠폴라에 올라갔다. 이 쿠폴라는 피렌체 도심을 걸을 때마다 계속해서 눈에 들어와서 볼 때마다 경치에 대한 기대감이 커져갔다. 1월 초, 나는 책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었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서 영화도 무척 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 머릿속의 상상을 화면이 아닌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완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잔뜩 부푼 기대감과 함께 463개의 계단을 올라 정상에 도착했다. 그러나 쿠폴라의 모습은 내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긴 일자 복도에서 뒤돌아 서있는 아오이를 바라보는 준세이를 상상했지만, 그런 일자 복도는 없었다. 대신 돔을 중심으로 누군가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수 없는 동그란 형태였다. 또한 한 커플이 의자에 앉아 있는 준세이에게 플라스틱 카드를 준 장면도 너무 달라 머릿속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아울러 유리벽으로 가려진 천장화까지, 내 환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렇지만 바깥 경치는 매우 아름다웠다. 옆에 우뚝 서 있는 조토의 종탑과 평화롭고 잔잔한 피렌체의 전경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다시 내려와서는 카페에 들렀다. 원래 커피를 못 마시지만—한 잔만 마셔도 몹시 어지럽다—, 이탈리아에 온 만큼 한 잔 마셔보았다. 이왕 마셔볼 거 에스프레소를 골랐는데, 이 때문에 밤에 잠에 드는 데 애먹었다.
젤라또를 하나씩 사들고 베키오 다리를 건너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갔다. 아르노 강을 건너면서 사람 수는 부쩍 줄어들었다. 하지만 광장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점점 사람이 보이더니, 정상은 일몰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피렌체의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한 뒤, 숙소로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탔다. 미리 Tabacchi에서 사둔 1회권을 펀칭하면 90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우리랑 같이 버스를 탔던 두 한국인은 표 없이 버스를 탔었는데, 내릴 때 검표원들에게 걸려 범칙금을 냈다. 로마와 달리 피렌체는 꽤 자주 검표하므로, 꼭 표를 사길 바란다. 저녁으로는 오랜만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푸근한 숙소에서 뜨끈한 국물까지 마셔주니 행복이 따로 없었다.
마나롤라 - 베르나차
피사+친퀘테레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다. 중앙역까지 겨우 도보 5분 거리에 숙소를 잡았던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며 집결지로 갔다. 로마에서 다녔던 투어들과 달리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우리 가족 셋과 다른 가족 셋 해서 여섯 명이 가이드가 모는 승합차를 타고 라스페치아로 이동했다. 어쩌다 조수석에 앉게 되어 처음에는 가이드의 설명을 나름 열심히 들었지만,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계속해서 들고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머지 다섯이 이미 숙면을 취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가이드는 설명을 멈추고 내게도 잘 시간을 주었다.
우리는 라스페치아에서 기차를 타고 친퀘 테레로 이동했다. 친퀘 테레란 다섯 개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하루에 다섯 마을을 모두 둘러볼 수는 없기에 두 마을만 들르게 되었다. 우선 두 번째 마을 마나롤라로 갔다. 친퀘 테레라고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그 전경을 바로 이 마을이 담고 있다. 오전이라—보통 피사를 먼저 가지만 일기예보 때문에 일정을 바꾸었다—역광인 점이 다소 아쉬웠다. 다채로운 파스텔 톤의 주택들을 햇빛이 삼켜 버렸다. 그래도 가이드와 함께 역광이 아닌 곳을 열심히 찾아 예쁜 사진들을 건질 수 있었다. 사진에 온전히 담기진 않았지만, 바다와 계단식 농장 사이에 자리잡은 알록달록한 마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다음 네 번째 마을 베르나차로 갔다. 잠깐 해안을 구경한 뒤, 산을 따라 10분 정도 올라가 점심을 먹었다. 가이드가 예약해 둔 식당의 이름은 Ristorante La Torre이었다. 사실 폼페이에서 먹었던 점심 식사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투어에서 예약해 주는 식당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이드가 이곳은 뷰 맛집이라는 말을 하길래 음식 맛은 그럭저럭이겠구나 싶었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 음식이 나오자 자리로 되돌아가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트로피에 알 페스토와 먹물 파스타, 문어 구이를 먹었다.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두 달 전쯤 친구가 피렌체에 다녀오면서 사온 트로피로 대충 바질 페스토를 만들어 먹었을 때도 충분히 맛있었는데, 식당에서 먹는 트로피에 알 페스토 일품이었다. 그 외에 먹물 파스타와 문어 요리도 정말 맛있었다. 음식과 경치 모두 최고였던 식사를 마치고 라벤더 맛 젤라또로 입가심하며 피사로 갔다.
이렇게나 많이 기울었다고, 이것이 내가 느낀 피사의 사탑의 첫인상이다. 한 명씩 가장 평평한 돌 위에 서서 기울어짐을 이용한 엽기적인 사진들을 찍었다. 균형 잡기가 쉽지 않아 난이도가 제법 높았다. 이후 탑 주위를 돌아다니며 감상을 했다. 멀리서 봐야 멋있는 탑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람 구경만 하다 나왔다. 입장료를 내면 탑 내부에 들어가 볼 수도 있었는데,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피렌체로 돌아와 가이드와 작별한 뒤 Mangia Pizza라는 식당에 가서 피자로 저녁을 해결했다. 특이한 모양과 푸짐한 토핑의 1인 피자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먹기도 편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크기는 작은데 토핑의 양은 로마에서 먹었던 둥그런 피자와 비슷했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 추가로 한 판을 포장해 왔다. 이 피자와 맥주가 아시안컵 8강에 힘겹게 진출한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의 답답함을 해소시켜 주었다.
우피치 미술관 - 조토의 종탑
아주 만족스러웠던 피렌체 숙소를 겨우 두 밤 만에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무척 아쉬웠다. 밀라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Bounce 어플을 이용해 짐을 맡긴 뒤, 시뇨리아 광장으로 가서 우피치 미술관 투어에 참여했다. 누차 서술했듯 미술에 관심이 아예 없는 내게도 이 미술관은 나름 의미가 있다; 문명6에서 문화승리를 위해 꼭 짓는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아무튼 거의 3시간 동안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그림들을 감상했다. 초반에는 집중해서 들었으나 코감기 때문에 그 집중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숙해야 하는 실내에서 오랜 시간 있으니 코가 무척 답답해서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어코 미술관에서 나올 때가 가장 좋았다.
이후 동생 대학교 후배의 인생 맛집이라는 Zaza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뇨끼는 조금 아쉬웠지만 카르보나라와 새우 파스타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전날 점심을 먹었던 식당이랑 맛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음식값은 경치에 대한 자릿값만큼 더 싸서 이곳 또한 만족스러웠다. 밥을 다 먹고 피렌체 대성당에 다시 가서 내부를 둘러본 뒤 조토의 종탑을 올랐다. 철장이 있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돔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차분한 피렌체 전경에 떡 하니 서 있는 거대한 돔은 동서남북 위아래 어디서도 돋보였다.
맡겨둔 짐을 다시 챙겨 피렌체 공항에 갔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떠나보내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맛있게 먹었던 음식들과 예쁘고 웅장한 건물들과 따스한 햇살까지, 남은 교환학생 기간 동안에는 느끼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먼 미래에 봄이나 가을에 다시 와서 일주일 정도만 현지인처럼 느긋하게 살아보고 싶은 희망을 남기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