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기술고시에 합격한 후, 연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다. 공직에 들어서면 장기간 시간을 내기 어려울 거라는 선배들의 말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해외가족여행을 추진했다. 교환학생 시절 질릴 정도로 추운 여행을 했기 때문에, 무조건 따뜻한 여행을 가자고 했다. 더욱이 가족여행이기에 치안이 좋은 호주와 뉴질랜드에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사실 5년 전, 고등학교 동기들과 이미 한 번 호주에 다녀왔었다. 보름 동안 브리즈번에서 시작하여 골드코스트와 시드니를 거쳐 멜버른까지 여했다. 친구들과 티격태격하며 즉흥적으로 다니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갓 성인이 되었던 터라 얼렁뚱땅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지 않았던 곳들, 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이런 구멍들을 채우고 당시의 추억을 회상하는 절호의 기회가 5년이 지나 내게 찾아왔다.
본다이 비치 - 하이드 파크 - 피어몬트 브리지
빗방울이 투둑투둑 창을 때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당시 무안공항 참사 때문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지 다소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아무 문제 없이 착륙했고, 무인 입국 심사 시스템을 지나―여권에 스스로 입국 도장을 찍을 수 있게 해 주지―세관 신고를 하러 갔다. 내 캐리어에 음식과 의약품을 몰아넣어 나만 빨간 선을 따라갔고, 나머지는 초록 선을 타고 빠져나갔다. 출국 전부터 세관 신고에 대한 걱정을 꽤나 했었다. 특히 음식물에 대한 검사가 엄격하다는 정보를 많이 접해 휴대전화에 그 목록을 저장해 두었다. 하지만 걱정이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심사 전 보안요원이 와서 무슨 음식이 있냐는 질문을 하길래, "Seaweed and other stuffs."라고 답하니, 검사도 안 하고 보내주었다. 인상이 선한 덕이라고 스스로 결론짓고 뿌듯해하며 나왔다. 오히려 초록 선을 따라 간 나머지 가족들이 나보다 10분이나 늦게 나왔다.
공항에서 숙소까지는 Uber를 타고 갔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기차가 있긴 하지만, 인당 약 20달러로 꽤나 비싸다. 짐이 많고 일행이 셋 이상이라면 UberXL을 타는 것이 싸고 편하다. 이번 여행의 첫 숙소로 에어비앤비 대신 호텔을 선택했다. 우리는 Boulevard Hotel을 선택했는데, 위치가 하이드 파크랑 멀지 않을뿐더러 다른 호텔들에 비해 가성비가 아주 뛰어나서 고민도 없이 결제했다. 다행히 방이 비어 일찍 체크인을 하고 바로 점심을 먹으러 Bar Reggio라는 식당으로 갔다. 가족여행에서 여동생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역할이 맛집 탐색인데 첫 선택은 무난했다―콜키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흠이었다. 해산물이 가득 올려진 바삭한 마리나라 피자가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피자들에 견주는 맛이다. 최악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티웨이 항공 덕분에 평범했던 샐러드와 파스타들도 맛있게 먹었다. 짜고 느끼함을 옆자리 현지인들이 마시는 시원한 와인을 눈으로 마시며 달랬다.
꾸리꾸리한 날씨 때문에 시드니에 온 후 내내 고민했던 본다이 비치에 결국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날이 개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모님과 동생은 서큘러 키로 가고, 나는 5년 동안 묵혀둔 본다이 비치로 갔다. 먼저 둔덕 위로 올라가 해변을 내려다보았다. 광활한 바다 위로 파도가 격렬히 춤추고 있었다. 가수의 공연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호응하듯, 사람들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호응했다. 탁 트인 전경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드넓고 깨끗한 해변을 보니 속이 뻥 뚫렸다. 모래밭으로 내려가서 신발을 벗고 직접 모래를 밟아보았다. 거센 바람 때문에 수영은 불가능해서―기껏 긴바지 안에 입고 온 수영복이 무색해졌다―바닷물에 발만 담그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반대쪽 끝까지 쭉 걸으면서 경치와 아름다운 누님들을 구경했다. 모래알 때문에 발이 아파오자 마을로 올라가 젤라또를 사 먹은 뒤, 현지인처럼 잔디밭에 누워 팝송을 들으며 바닷바람을 느꼈다. 날이 다시 흐려져 추위를 느끼자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은 다시 모여서 미리 예약해 둔 Alfie's에서 먹었다. 각자 소 등심 스테이크 220g과 사이드를 하나씩 주문했다. 아주 늠름한 여종업원이 사이드로 최소 Full 2개와 Half 2개를 추천해 주었지만, 우리는 완강하게 Half로만 4개를 시켰다―이 또한 우리에게 벅찼다. 종업원이 추천해 준 Medium-rare 스테이크는 정말 부드러웠다. 소고기가 질기지 않고 입에서 스르륵 녹았다. 또한 간도 질감도 양도 아주 적절했다. 곁들여져 나온 와사비 소스와 사이드로 시킨 오이가 느끼함까지 잘 잡아주어 완벽한 저녁 식사였다.
여행 첫날이라 피곤함을 느낀 아버지와 동생은 먼저 복귀하고, 어머니랑만 불꽃놀이를 보러 달링 하버로 갔다. 시드니에서는 매주 토요일 불꽃놀이를 한다. 여름 기간에는 21시에 진행하는데, 아직 1시간 정도 남아 아무 벤치에 앉아 달링 하버를 구경했다. 바로 앞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크루즈 앞에 긴 줄을 서고 있었다. 모두 다 작정하고 꾸민 모습을 보아하니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파티를 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나 많은 사람을 한 배를 촘촘히 태우는 것이 살짝 걱정도 되었다. 해가 완전히 지자 피어몬트 브리지에 올라갔다.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야경 투어의 필수 코스인지, 유독 이곳만 한국인들의 비율이 극도로 높았다. 인파에 비해 불꽃놀이는 시시했다. 더구나 막판에 소나기가 쏟아져 돌아오는 길까지 힘들었다. 다행히 5분 만에 금방 잦아들어 생쥐꼴은 면할 수 있었다.
여행 첫날부터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갈대 같던 날씨가 흠이었지만, 나쁜 날씨는 또 아니었다. 사실 전날까지는 날씨가 더 안 좋았는데, 다행히 우리가 호주에 오니 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기 예보를 보니 다음날에는 해가 화창한 완연한 여름 날씨를 느낄 수 있다고 해서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바틀샵에서 사 온 맥주로 맑은 날씨를 위해 건배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페더데일 동물원 - 세 자매 - 링컨스 락 - 서큘러 퀘이
전날의 기대에 부응하듯, 딱 투어가 있는 날 하늘이 맑고 햇살은 따스했다. 8시에 집합 후 바로 페더데일 동물원으로 출발했다―오전에 가야 동물들이 더 활기차다고 한다. 동생이 동물을 워낙 좋아해서 동물원이 포함된 블루 마운틴 투어를 미리 신청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갔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5년 전에 갔었던 시드니 WILD LIFE와 비교했을 때, 공간도 넓고 동물들이 생생했다. WILD LIFE의 코알라와 캥거루는 죄다 자고 있었던 반면, 페더데일의 코알라는 열심히 유칼립투스잎을 먹고 있었고 왈라비와 캥거루는 먹이를 든 사람들을 쫓아다니기도 했다. 나도 왈라비에게 먹이를 주었다. 처음에는 사슴 눈망울로 따라와 곧잘 먹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먹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먹이를 주다 보니 더 이상은 위에 남은 공간이 없는 듯했다. 우리는 추가로 돈을 내가 코알라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었다. 유일하게 코알라를 직접 만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보슬보슬한 코알라의 엉덩이에 살포시 손을 얹는 포즈를 취했다. 그 외에도 에뮤, 웜벳, 쿼카―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열심히 새 생명을 만들고 있었다―등을 볼 수 있었다. 사자, 기린 등 평범한 동물들이 없고 호주에 서식하는 동물들만 모아두어서 아주 알찼다.
그다음 블루 마운틴으로 갔다. 5년 전 산불 때문에 가지 못했던 한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우선 세 자매 봉과 산맥 전경이 보이는 전망대에 갔다. 이름에 걸맞게 수목들은 정말 푸르렀다. 이후 시닉 월드에서 다른 사람들이 기구를 타는 동안―우리는 이 옵션을 선택하지 않았다―우리는 전망대에서 경치를 보며 쉬었다. 나는 혼자 산책길을 찾아 카툼바 폭포를 멀리서 감상했다. 가격이 많이 비싸서 시닉 월드를 신청하지 않았는데, 1시간이나 붕 떴고 다시 오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냥 신청할 걸 뒤늦게 후회했다. 특히 가족여행이었던 만큼 돈 생각을 조금 버릴 필요가 있었는데, 아직 교환학생 시절의 관성이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후 오후에는 로라라는 작은 마을에 들렀다. 블루 마운틴 관광객들이 중간에 점심을 해결하는 곳이라 마을 규모에 비해 시끌벅적했다. 우리는 가이드가 추천한 태국 음식점 Leura Thai house을 선택했다. 다른 음식들도 괜찮았는데, 특히 해산물 팟씨유와 푸팟퐁커리가 일품이었다.
어느덧 마지막 코스인 링컨스 락에 갔다. 블랙핑크 제니가 이곳 절벽에서 찍은 아찔한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유명해진 명소이다. 시간대를 잘못 고르면 사진 찍는 줄이 엄청나다는데, 다행히 우리가 갔을 때는 매우 한적했다. 가이드의 섬세한 지시에 따라 아슬아슬한 사진들을 건졌다. 아버지께서는 귀찮다는 핑계로 찍지 않으셨고, 어머니는 벌벌 떨며 간신히 절벽에 앉아 사진을 찍는 데 성공하셨다. 또 활달한 남자아이 둘을 데리고 온 어머님도 있었는데, 장난치다 사고가 날까 두려워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비록 모델은 제니만 하지 못했지만, 장엄한 경치가 멋진 사진을 완성시켜 주었다. 스릴을 만끽하고 혼자 푹 빠져 광활한 경치를 감상했다. 탁 트인 시야에 잡히는 푸른 절벽들이 초록 옷을 입힌 그랜드 캐니언을 연상시켰다.
그렇게 17시쯤 투어가 끝났다. 근처 면세점에서 T2 차를 산 뒤 숙소로 정비하고 다시 나왔다. 시드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서큘러 키의 일몰을 감상하기로 했다. 오페라 하우스는 옛날보다 덜 누렇게 보였다. 최근까지 내린 비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느긋하게 한 바퀴 돌고 하버 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야외 테이블을 잡았다. 오페라 바의 음식 가격이 상당했다. 하지만 오후의 교훈을 적용하여 돈 생각은 하지 않고 바닷바람을 쏘이며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야외 테이블을 잡았다. 맥주를 시키고 더 좋은 자리가 생겨 옮겼는데, 종업원이 착각하고 기존 자리에 맥주를 갖다 주었다. 이 사실 종업원에 알려주고 기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그 맥주를 가져왔는데, 종업원이 다시 새로 맥주를 들고 왔다. 공짜로 얻어 마시는 맥주는 두 배로 맛있는 법. 주전부리들도 시켜 먹으며 밤이 완전히 이슥해질 때까지 마음껏 멋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새벽 일찍 일어나 Uber를 타고 공항까지 편하게 갔다. 새벽이라 택시가 잡히지 않을까 걱정하며 잠들었는데, 2분 만에 잡혀 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대부분 홀로 다녀 택시를 탈 수 없었던 교환학생 시절이 자꾸 떠올랐다. 어떻게든 돈 한 푼 아껴보겠다고 아등바등했던 그 시절의 내게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이제는 택시의 맛을 봐버려서 다시는 거지 여행을 못할 것 같다.
채 48시간도 시드니에 있지 못해 무척 아쉬웠다. 시내가 무척 예뻐서 현지인이 사는 것처럼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호주 오픈 직관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 아쉬움을 다른 곳에서 만회하기로 하고 멜버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