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애주가 필독서
나는 애주가다.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자주 술을 즐겼다. 아버지는 술장사를 하셨다. IMF 직전 스스로 회사를 나와 세계 맥줏집을 차리셨다. 호텔에서 일하셨던 아버지는 클럽 지배인 경력도 있으셨고 수입 양주, 맥주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고, 심지어 직접 칵테일도 제조하셨다. 술에 관해서 아버지는 전문가였다. 직장을 다닐 때는 전 세계를 다니며 주류에 대한 배우고 호텔에서 판매할 제품을 골라오셨다. 세계 맥줏집은 2002 월드컵 덕분에 자리를 잘 잡았고, 대학생이 된 나는 아버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도 자주 했다. (아르바이트비를 받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집에는 기념품으로 사 온 세계의 양주들이 종류별로 가득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아버지가 부재하실 때 슬쩍 조금씩 맛보기도 했다. 대학 시절부터 그렇게 나는 다양한 술을 접할 수 있었고, 애주가가 되었다.
사설이 길었다. 어쨌든 이 책을 고르게 된 것도 나의 이런 성향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삶에도 관심이 많지만 술에 대한 애정도 큰데, 이 둘을 모두 담고 있는 역사서라니! 읽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제목도 너무 내 취향이다.) 프롤로그를 보면 저자도 술을 즐기는 사람인데 (당연히 그러니 이 책을 썼겠지만) 그녀는 칵테일에 눈을 뜨고는 술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직접 칵테일을 제조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술에 대한 역사서와 자료를 모으면서 대부분 자료에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해했고, 직접 흩어진 정보를 모아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책을 쓰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면서 여성의 음주를 허용하는 문화와 여성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화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 술을 마시는 여성이 직면하는 이중 잣대는 여성을 통제하려는 남성의 욕구, 그리고 소유물이 아닌 인간으로 행동하려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p.18
이 책은 우연히 발효된 알코올을 발견하여 마시기 시작한 태고의 술에서부터 최근 유행하는 칵테일까지 시대별 술과 여성의 역사를 정리했다. 기원전 6-5천 년 전 초기 문명사회에서 주식으로 먹었던 맥주는 당시 영양분을 얻고 생존하기 위해 마셨다. 그때부터 모두가 즐기는 음료를 공급하기 위해 여성들은 맥주를 대량으로 양조한다. 가족들의 음식을 만드는 일을 주로 하는 것은 여성이었고, 물을 깨끗하게 정수하는 기술이 없었던 과거에는 수분 보충을 위해 물을 술로 빚어 마셨던 것이다. 이후 역사를 보더라도 술을 빚어내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다. 현대에서 바라보니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기원전 3천여 년 전 이집트에서도 맥주는 대중적 음료였고, 술의 여신을 숭배하고 술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와인을 만들어마셨는데 이는 상류층에게만 허락되었다고 한다. 이 시대는 남녀 불문학 모두가 자유롭게 술을 즐겼는데 당시엔 남성과 여성이 상당 부분 동등한 법적 권한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다 한 인물로 인해 술을 즐겼던 여성의 권한이 박탈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명언을 남긴 함무라비 왕은 기원전 1754년 각종 범죄와 규정에 대한 282개 조항을 만들었는데 이때 가부장제를 확립하면서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했다고 한다.
"함무라비 법전은 보호라는 명목하에 여성의 수많은 권리를 빼앗고 그들을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로 만들었다. 여성은 가정을 벗어나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또한 여성에 대한 학대는 금했지만 그래도 마땅한 여성에 대한 학대는 허용했다. 이 법전은 남성에게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고 나아가 성적 권리를 통제할 권한을 주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여성의 경제적, 성적 자유에 대한 치명타였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치명타를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p.41
기원전 50-30년 경 이집트의 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오늘날 매혹적인 외모에 팜므파탈로 그려지지만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학자들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백성들과도 이집트어로 소통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어를 썼다고 한다.) 매우 현명한 군주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과 왕좌를 경쟁했지만 결국 통치자로서 위대한 면모를 보였기에 왕으로 군림했고, 여왕으로 매우 지혜롭게 군대를 지휘하고 경제를 관리하고 타국들과 협상했다고 한다. (의학, 산부인과, 측정 체계에 대한 서적을 편찬했다고 하니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급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냥 여왕이었다. 그녀는 뛰어난 철학자이자 학자였고, 실리주의적인 군사 지도자였다. 그리고 술을 마시는 여성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술 마시는 여성이 상징하는 모든 것, 즐 두려움의 대상이자 환상의 대상이었다. 가부장제의 남성들은 자유분방한 여성을 원하지만, 자신의 통제 안에서만 자유롭기를 원한다. 남성들은 여성의 음주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경우에만 용인한다." -p.69
당시 이집트는 여성이 음주도 할 수 있고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로 클레오파트라 같은 군주도 가질 수 있었지만, 같은 시대 로마는 여성이 술을 마시다 들키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니 카이사르와 연인 관계였던 클레오파트라를 로마 사람들은 어떤 시선을 봤을지 짐작이 된다. 그래서 현재 클레오파트라 존재의 이미지가 팜므파탈로 왜곡되어 전해진 것 아닐까?
중세 시대에도 술의 역할은 비슷했다. 그냥 물을 마셨다가는 병에 걸릴 것이고, 커피나 차는 아직 전해지기 전이라 가장 흔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은 맥주였다. 종교의 시대였던 중세 시대의 여성은 처녀, 아내, 과부로만 구분됐는데 당시 가난한 여인들은 '에일 와이프'라고 술을 제조하고 판매하던 여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교회는 '에일 와이프'(술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여성)를 신실한 남성을 죄악으로 이끄는 유혹자로 묘사했다고 하니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만들어 파는 것만으로도 핍박을 받았으니 당시 여성들의 삶은 보지 않아도 알만하다.
'에일 와이프'의 시대가 가고, 남성 소유의 술집이 빠르게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에일 하우스'는 공식적인 술집이 되었다. 1500년대 여성들은 술을 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술을 빚는 것은 여성이었고, 가장 먼저 맛보는 것도 여성이었지만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은 남성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 '증류주'가 생겨났다. 이전 발효주가 주를 이루던 시대에 도수가 높은 '증류주'는 혁명과도 같았다. 여성들은 증류주 생산에 참여했지만, 16-17세기 초까지 술 취한 여성은 마녀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18세기가 시작되면서 주류 외 세계적인 혁명적인 변화가 일었다. 산업화가 빠르게 번졌고, 전 세계는 식민화되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술을 제조하는 이는 여성이었지만 만들어진 술은 남성 가장의 소유였다. 여성이 직접 양조장에 참여하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남편의 이름으로 술을 판매했다. 술을 마시고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은 마녀의 표상이었던 시대, 여자란 자고로 국가의 노동력이 되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존재로 가부장제 사회를 견고히 유지시켜줘야 하는 사회에서 술이란 다른 의미로 여성을 해방시키는 존재였지 않았을까? 그래서 가부장제 사회는 그토록 술 마시는 여자를 증오했나 보다.
술을 이용해 자신의 제국을 지켜낸 러시아 '예카테리나', 샴페인 창시자 클로드 '모엣', 미망인으로 샴페인 시장의 세계화를 이끌어낸 사업가 '카르브 니콜 클리코', 일본에서 사케 양조장에서 업계 최고 영향력이 있었지만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는 사업가 '다츠우마 기요', 현재까지 사랑받는 '행키팽키' 칵테일을 만든 칵테일의 여왕 '에이다 콜먼' 등 다양한 주류 사업을 꾸려간 여성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도 굉장히 신박하다. 18세기에서 19세기 초기까지 카페가 등장하고, 팝 등이 생겨나던 시기인 빅토리아 시대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오히려 여성 절주 운동이 일어나며 여성의 음주는 사적인 공간으로 내몰린다
규제의 부재 속 증류주가 보편화되고 있던 가운데 회사는 술을 약처럼 대용할 수 있다는 약용 음주를 권고하며 술을 팔았다. 그러자 알코올로 사망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대대적인 문제가 되자 1852년 절주 운동 단체가 나타나고, 1920년에는 금주법의 시대가 도래한다. 1900년대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절주 운동과 여성 참정권 운동을 모두 반대하던 세력은 둘을 교묘하게 엮어서 투표권을 주면 여성들이 술을 없애버리고 말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하지만 금주법이 시행되자마자 불법 음주 문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모두가 술을 마시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밀주가 성행하자 영국의 '클레오 리스고'는 자신만의 위스키를 수백만 갤런 씩 팔아 '밀주의 여왕'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의 금주법은 1966년 폐지된다.)
"금주법 시대에도 음주 문화를 지킨 것은 여성이었다. 금주법 폐지를 이끌어낸 이들 또한. 여성들은 술을 마시고 전국에 공급하고, 집회를 조직하면서 금주법 시대 내내 알코올의 가장 강력한 동맹이 되어줬다." -P.312
그리고 이 책에는 한국에서 막걸리를 빚었던 여성에 대한 언급도 있기에 반가웠다.
"수 세기 동안 한국의 가정에서 술을 빚는 일은 김치나 간장 등 다른 발효 식품 제조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몫이었다. 증류와 양조 기술은 모두 여성의 주도로 발전했다. (...) 1934년에는 가정에서의 술 제조를 전면 금지했다. (...) 그러나 한국의 여성들은 멈추지 않았다. 전 세계의 여성이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가정에서의 양조가 불법이 된 후에도 술을 계속 빚었다." -P.321
수백 년간 주류 산업에서 끊임없이 밀려나고 배제되었던 여성이 1980-1990년대가 되어서야 공식적 합법적으로 양조와 증류의 세계에 입성했다고 한다. 수천 년간의 역사 동안 여성이 제조해 왔는데 불과 30-40년 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여성의 지위와 권한이 나아진 것이 불과 몇십 년 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떤 술을 마시든 이제 우리는 그 술의 역사 속에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건배할 수 있다."
술을 마시던 마시지 않던 여성이 뭘 하든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께름칙한 시선을 받지 않는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 아니었을까. 총 485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이지만 작가의 유려한 필력과 함께 새삼스럽게 알게 된 역사적인 진실이 너무 재밌어서 술술 읽힌다. 읽다 보면 향긋한 칵테일 한 잔, 살얼음 낀 시원한 맥주 한 잔, 뜨끈한 사케 한 잔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데 애주가라면 반드시 필독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