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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렉투스의 유산 - 일부일처제

by 할리데이

<이미지> 투르카나 소년(호모 에렉투스) / Mauricio Antón, published with Alan Turner



현대인들은 ‘일부일처제’라는 가족 구성방식을 보편적이면서도 당연한 사회규범으로 여기고 있다. 그것을 우리 인간들의 지성과 교양의 산물이라 자부하며 말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일부일처제는 우리들의 지성과 교양의 산물이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가 우리들에게 물려준 유산 중 하나다.


오늘날의 대형 유인원 중 고릴라는 수컷이 암컷보다 덩치가 두 배 정도 크다. 사람의 경우 남자의 덩치가 여자보다 15~20퍼센트 정도밖에 더 크지 않은 데 비해 상당한 차이다. 초기선행인류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 이전의 인류들 또한 남녀의 덩치 차이가 1.5 배 이상이었다. 이에 반해 호모 에렉투스에 이르러서는 남녀의 덩치 차이가 현생인류의 그것처럼 20퍼센트 정도의 차이로 줄어들게 된다. 현생인류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큰 의미가 있다.

수컷(남자)의 덩치가 크다는 것은 암컷(여자)을 독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산물이다. 오늘날에도 물개류나 사자 등이 하렘 형태의 생식방식을 운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컷과 암컷이 한 쌍씩 짝을 짓는 게 아니라 우두머리 수컷 한 마리 또는 소수의 몇 마리가 무리의 암컷 전체를 차지하는 생식방식 내지 가족 구성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이 지속되면 크고 강한 수컷 개체만이 자손을 번식시키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수컷이 더욱 큰 덩치로 성장해 갈 수밖에 없는 진화상의 압력을 받게 된다. 이를 토대로 유추해 보면 과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는 마치 물개나 사자, 혹은 고릴라처럼 하렘 형태로 가족 구성방식을 운영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반면 호모 에렉투스 대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현생인류와 비슷한 일부일처제 형태의 가족 구성방식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호모 에렉투스는 그때까지의 하렘 형태의 가족 구성방식을 포기하고 일부일처제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복잡한 메커니즘이 작용했다. 도구의 사용 등과 더불어 인류의 두뇌 용량은 조금씩 커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직립보행의 영향으로 골반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게 되었다. 여성의 산도(産道, 아기를 낳는 신체기관)가 좁아진 것이다. 아기의 머리는 커지게 되고, 그것이 나와야 할 여성의 신체 부위가 오히려 좁아지게 된 것은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인류는 ‘이른 출산(조산, 早産)’이라는 방식을 택해 이를 해결했다. 아기를 완전한 개체의 상태로 출산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덜 자란 상태, 즉 사람으로서 기능을 전혀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미숙아 상태에서 출산하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포유류들은 새끼를 어미 뱃속에서 이미 아성체(亞成體, 준성체) 상태까지 자라게 한 뒤 출산한다. 가령 초식동물의 경우, 새끼가 어미 뱃속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오자마자 불과 몇 초 만에 뛰어다닐 수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에 비해 갓 태어난 인간의 아기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상당 기간 어머니의 절대적인 보살핌이 필요하다.

이것은 여성의 관점에서 보면 여간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먹고살기 위한 생산 활동과, 절대적 보살핌이 필요한 자식을 위한 양육 활동을 도저히 병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건성으로 돕는 게 아닌 헌신적인 도움이 필요해졌고, 성인 여성 한 명과 한 명 이상의 아이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구체적인 도움이 필요해졌다. 이는 하렘의 수컷 내지 남성 우두머리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 그 역할을 이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 말이다. 진화과정상의 강한 압력으로 한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 짝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호모 에렉투스는 일부일처제라는 가족 구성 체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진화과정 상의 이 일부일처제에 의한 가족 구성과 집단의 구성은 인류의 진화과정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우선 아이들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아졌다. 생산 활동에서 상대적으로 해방된 아기의 어머니는 육아에 전념할 수 있었고, 이는 신생아들의 생존율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불러왔다. 거기에 더해 일부일처제에 의한 가족 구성은 인류에게 노년이 있는 삶을 선물로 주었는데, 노년의 삶을 살아가던 노인 특히 할머니의 육아 보조는 아마도 손주의 생존율을 더욱 끌어올렸을 것이다.

둘째로는 사회화 과정이 길어짐에 따른 문화의 체계적인 전승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본능 또는 어미에 의한 극히 짧은 기간 동안의 교육 과정을 거치는 여느 포유동물들과는 달리 호모 에렉투스의 아이는 너무나도 긴 교육―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에렉투스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에 의해 지속적으로 사회화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결국 문화의 형성과, 이미 형성된 문화의 체계적인 전승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아이 내지 청년들은 유년기를 훌쩍 넘긴 20대까지 사회화를 위한 교육을 받고 있다. 이는 호모 에렉투스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중 하나이다. 인간은 이 유산을 발판 삼아, 문명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다.


*이번 편은, 몇 개월 뒤 발행할 '인류의 기원'편을 사전 정리하여 미리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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