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간막동맥 박리
꾸지 않았으면 좋았을, 여름밤의 꿈을 꾸고 말았다. 80주년 광복절을 이틀 앞두고, ‘상장간막 동맥 박리’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병에 걸리면서 꿈은 그렇게 갑자기 시작되었다.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면서 꿈은 점점 깊어만 갔다.
8월 13일, 평소처럼 별일 없이 잘 출근했다. 점심때가 되어서는 순두부찌개로 끼니 잘 때우고 사무실로 와서는 커피까지 한잔 잘 마셨다. 그런데 이게 웬일. 1시 30분쯤 되어 배꼽 주변으로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5분도 채 안 되어 떼굴떼굴 구를 정도로 배 전체가 아파 왔다. 처음에는 아리하게 아프던 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복통으로 변해 가면서였다. 이마와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히면서, 급기야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싸하게 왔다. 동료 직원의 도움을 받아, 사무실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병원급 병원인 파티마 병원으로 급히 향했다. 입에서 절로 새 나오는 신음과, 119 구급차를 부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교차하기를 몇 번. 그리고선 파티마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2시간여에 걸쳐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담당 의사 선생님이 상장간막 동맥 박리라며 중환자실 입원 조치를 지시한다. 그 병이 무엇인지를 묻는 나의 질문에, 의사 선생님은 보호자만 찾는다. 내가 누워있던 병상으로부터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던 아내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대화를 마칠 무렵 아내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다시 한번 싸한 느낌이 들었다. “위험하대” 아내의 첫마디였다. 소장과 췌장 쪽으로 가는 중요한 동맥이 있는데 그 동맥에 박리(벗겨짐)가 일어나면서, 벌어진 혈관 막 사이에(동맥은 3겹의 미세한 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혈전이 고여 혈류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단다. 그렇게 되면 소장 조직이 괴사할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할 경우 생존율이 5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단다.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 직전 단계라며 지금 바로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아내의 얼굴이 사색이 될 때 내 등으로는 이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내렸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 건가? 내가? 지금?’ 무서웠다. 차디찬 냉기가 몇 번이나 더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중환자실에서의 경험은 고통과 공포 자체였다. 몸은 고통스러웠고, 정신은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우선 말할 수 없이 불편했다.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오른손 왼손 할 것 없이 양손에 다 링거 바늘이 꽂혔다. 링거 원줄 하나당 링거팩이 서너 개씩 매달린 채다. 왼쪽 가슴에는 심전도계 센서가 부착되었고, 팔뚝에는 혈압계 커프(압박 튜브)가 부착되었다. 또 왼손 검지에는 산소포화도 센서라는 것도 부착되었다. 링거줄, 심전도계 선 등 온갖 선줄 10여 개가 내 몸을 계속 감싸고 있어, 몸이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거의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간호사들은 간호사들대로 몸 하나 겨우 누이는 병상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게 했다. 중환자실의 매뉴얼인 모양이었다. 나는 의식이 멀쩡한데, 의식이 없는 다른 환자들과 똑같은 매뉴얼을 적용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 평이 채 되지 않는 좁디좁은 병상에서, 심지어 대소변까지 받아 내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몇 날 며칠을 보낸다는 것은 생각 이상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무서웠다. 면회객으로서도 한번 가본 적이 없던 중환자실에 내가 환자가 되어 입원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거기에 더해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엄포는 나를 완전히 패닉에 빠트렸다. 하루에 수십 번씩 등골이 싸늘해지고, 모든 의식이 ‘내가 지금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하염없이 두려웠고, 무서웠다. 게다가 주변의 일들, 중환자실의 나 아닌 다른 대부분 환자들이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는 사실과 가끔 사망에 이르러 실려 나가는 다른 환자들의 모습은 나를 더욱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항응고제, 혈전 용해제, 혈관 확장제, 혈압강하제 등을 투여받고, 열흘여 간에 걸친 금식 덕분에 몸은 상당히 회복되었다. 기분도 많이 좋아졌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의 집중치료 덕에 응급상황을 넘긴 나는 일반 병동으로 전동(轉棟)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식이 끝나고 열흘 정도 더 병실에 머문 끝에 드디어 퇴원을 승낙받았다. 행여 다시는 못 가볼까 노심초사하던 집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9월 1일, 응급실로 실려 간 지 딱 20일 만이었다.
퇴원은 했지만, 나는 이미 소장과 췌장으로 가는 주요 동맥인 상장간막 동맥과 그 부속 동맥들이 많이 손상되어 있어 소장 기능을 정상적으로 회복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온전한 식생활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잃어 버린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론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소장이 최소한의 기능은 할 수 있다는 사실과 궁극적으로는 응급상황을 무사히 넘기면서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만족하고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고스란히 맛보기도 했다. ‘종점 체험’이라는 생각지 못한 경험에 삶의 비애를 맛보았고, 세상살이 과정에 급작스레 일어나는 불행한 사태로부터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작은 진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종점 체험이란 말은 비록 내가 만들어낸 표현이지만, 참으로 되뇌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서글플 따름이었다. 철학적인 이유에서가 아니었고,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면서 삶의 덧없음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가끔씩 유명을 달리하는 다른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사 부질없음을 깨달아서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인생의 마지막 지점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삶의 여정 마지막에 누구나 예외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 중환자실에서의 생활을 몸소 체험했다는 말이다. 서글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음이라는 삶의 마지막 과정은 엄숙하고 존엄한 과정이리라 생각했다. 삶의 마지막 과정인 만큼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당사자는 당사자대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의 마지막을 대하는 당연한 자세로서 말이다. 몸을 정갈하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서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품위있게 만들어 가야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샤워는커녕 손 한 번 씻지 못하고 대소변조차 남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는 몸은, 정갈과는 거리가 멀었다. 맑은 정신 또한 꿈도 꿀 수 없었다. 중환자실 환자의 대부분은 아예 의식이 없었다. 그나마 의식이 있는 환자들도 육체의 고통에 신음하거나 섬망 증상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었다.(헛것이 보이는 증상을 섬망이라 한다. 나도 이번에 경증의 섬망 증상을 경험했다. 좁은 병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로지 머리로 생각만 하면서 몇 날 며칠을 보내게 되면 결국 꿈과 현실, 생각과 실제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급기야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연히 헛소리도 따라 나온다. 또 하나의 되뇌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맑은 정신은 먼 곳의 이야기였다.
품위 있는 죽음이란 것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육체적 고통 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정신적 공포 앞에서,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잘 마무리한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하는 고귀한 죽음이란 것은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을 뿐, 중환자실에서 겪어 본 나의 경험으로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원하진 않았지만 미리 들여다보게 된 삶의 마지막 자화상에 그저 비애감이 들 따름이었다.
종점체험이 원치 않는 경험 이야기였다면,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된 이야기도 있다. 세상살이 과정에 급작스레 일어나는 불행은 누구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는 작은 진실 이야기다.
주변 지인들 중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간혹 있었다. 대부분 치명적인 급성질환으로 세상을 등진 경우였다. 그럴 때의 나를 돌이켜 보면,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도 했고 진심 어린 애도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다. 물론 의식적으로는 나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세상살이 웬만한 일에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나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번 투병 과정에 꼼짝없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것이다. 늦지 않았다는 것을 비롯한 몇몇 천운 덕분에 생명은 건졌지만, 나도 영락없이 치명적 급성질환에 걸리고 만 것이다. 이번 경험은 나에게 세상사 좋거나 나쁜 일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오롯이 깨닫게 해 주었다.
나도 한때는 자신감에 충만한 채 세상을 살아왔었다. 세상이 다 내 것 같았고,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재미있었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결코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특히 나라는 존재 또한 예외없이 작용하는 세상살이의 진실 앞에서, 평범하디 평범하고 약하디 약한 존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앞으로의 각오를 고백하며 여름밤의 꿈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비록 원치 않는 종착지 체험이 나에게 비애감을 안겨 주었고, 세상살이의 예외없는 냉정함이 나라는 존재의 보잘 것 없음을 고스란히 인식시켜 주었지만 말이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나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되었고, 평소 즐기던 술과 담배도 당연히 금지되었다. 일상에서의 즐길 거리가 송두리째 없어져 버린 셈이다. 상당히 괴로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별다른 돌파구가 있지도 않지만, 새롭게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에 오로지 감사해야 할 때문이기도 하다. 또 이번 꿈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지만, 작지 않은 깨우침을 안겨다 준 소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삶의 종착지에 대한 체험과, 불행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과,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지각은, 한편으로 세상살이의 진중함을 깨우쳐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조금 더 잘 살아야겠다. 나 자신에게도 좀 더 충실하고, 주변도 살펴보며, 항상 경건한 마음을 지닌 채 말이다. 꼬불꼬불 이어져 있는 삶의 길, 최선을 다해 한번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