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의 의의
신라 21대 임금 소지왕 때의 일이다. 임금이 천천정(天泉亭)이란 곳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출지(書出池)라는 연못에 이르렀다. 그때 연못 속에서 갑자기 웬 노인이 걸어 나오더니 임금께 글을 바치고는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신하에게 글을 읽어보게 하였지만 글의 겉봉에 “봉투를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뜯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씌어 있는 것이었다. 임금은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여겨 봉투를 뜯지 않으려 했지만, 일관(日官, 길일을 잡는 관리)이 “한 사람이란 임금을 이르는 것이고, 두 사람이란 일반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임금은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겉봉을 뜯고 내용을 읽어보게 하였더니,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는 뜻 모를 말이 쓰여 있었다. 그예 임금은 그 말을 좇아 급히 궁궐로 돌아와 애지중지하던 거문고 갑을 화살로 쏘았다. 그랬더니 비명 소리와 함께 남녀 한 쌍이 거문고 갑에서 뛰쳐나오는 게 아닌가. 사통(私通)을 저지르던 남녀이자 임금을 시해하려던 자객이었다. 예지력과 신통력을 지닌 노인, 다시 말해 연못 신령 덕분에 임금이 목숨을 건진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이(紀異) 제2’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삼국유사에는 이처럼 신이(神異, 신기하고 이상한)한 이야기 그리고 영괴(靈怪, 신령스러운 괴물. 여기서의 괴물은 영화에 나오는 그런 괴물이 아니다. 괴이한 현상이나 사물을 일컫는 말이다.)들의 이야기가 수시로 등장한다. 기이(紀異)라는 편명을 달고서다. 해와 달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버린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 둘로 쪼개졌다가 다시 합쳐진 대나무로 만든 만파식적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들이다. 유화부인(강의 신의 딸)이 해모수(태양신)의 은혜(햇빛, 사랑)를 받아 낳은 주몽이 나라를 세웠다는 고구려 건국신화를 비롯한 다른 수많은 건국신화들 또한 기이편에 수록된 여러 신이한 이야기들 중 하나들이다. 그리고 기이편의 이런 신이한 이야기들 중에 최고봉으로 단군신화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군신화는 이야기의 이런 신이한 전개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늘에서 신(神)이 내려온다는 이야기와 곰이 사람으로 변해버린다는 토테미즘적 전개로, 종교계로부터는 사이비 종교관으로 역사학계로부터는 정통 사료(史料)의 보조 사료로서만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이러한 신이한 현상과 영괴들이 등장하는 줄거리는 일찍이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로부터도 위사(僞史)로 평가받았었다. 학문적 엄격성과 그에 따른 고증을 중시하기 시작하던 당시의 실학자들에게는 ‘신이와 영괴’의 서사는 ‘엉터리 서사’에 불과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들은 단견(短見)에 의한 것이다. ‘신화적 구성’과 ‘역사적 사실’과의 차이점에 대한 몰이해와 나아가 단군신화가 가지는 역사적 함의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단견의 소치일 뿐이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하나였을까?(지금은 비록 둘로 나누어져 있지만, 어쨌든) 언제부터 한 민족, 한 겨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일설에 의하면, 고려 중기 이전까지의 우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비록 정체(政體)로서의 국가는 하나였지만 정체(正體)로서의 사람들의 마음은세 갈래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7세기 말 신라에 의해서 삼국이 통일되었지만,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하나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 국가는 여전히 고구려, 백제, 신라였다. 통일신라가 후삼국으로 나누어지기 전까지의 수많았던 지역 기반의 반란들은 물론 결국 후삼국 자체도 원래의 고구려, 백제, 신라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한강 이북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고 지금의 충청, 호남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백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년도 넘게 이어져 오던 이런 의식은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202년 신라 부흥을 외치며 경상도에서 일어난 이비‧패자의 난, 1217년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내건 평안도의 최광수의 난, 1237년 백제 부흥을 내걸고 일어난 전라도의 이연년 형제의 난 등은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이상호 교수의 ‘7개의 키워드로 읽는 세계기록유산 삼국유사’에서 인용). 고려 중기 이전, 몽골의 침입이 발생하기 전에는 우리들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1231년,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몽골이 고려를 침공했다. 말 그대로 고려를 침공했다. 구고구려, 구백제, 구신라를 침공한 게 아니었다. 자연스레 사람들은 고려라는 국가 즉 고려라는 정체(政體)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상당한 혼돈이 있었을 것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은 어쩌면 상당함의 정도를 넘어선 극심한 혼돈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혼돈의 시기에 일연은 우리의 역사를 새로이 정립하고자 했다. 역사의 정립을 통해 민족적 주체성과 자긍심을 고취하고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렇게 삼국유사가 탄생하였고, 이렇게 단군신화가 재구성되고, 재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일찍이 민족과 겨레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나아가 한 민족, 한 겨레라는 의식까지 싹틔웠다. 삼국유사 속 단군신화는 혈연 국가(가령 원삼국)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던 어정쩡한 영토 국가(통일신라와 고려)를 온전한 영토 국가로 만들어 준 이념적 기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삼국유사는 오롯이 우리 민족의 보서(寶書)다.
이제 다시 단군신화의 텍스트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이처럼 일연은 애초부터 단군신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큰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그 메시지를 풀어가는 과정에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소재로서 십분 활용하면서 편명(篇名)조차 기이(紀異) 즉 ‘이상한(異) 이야기들(紀)’이라 이름 지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삼국유사에서의 유사(遺事)의 의미도 ‘남겨진 일들’ 즉 ‘남겨진 이야기’를 의미한다. 삼국유사라는 말 자체가 ‘(정사인)삼국사기에 실리지 않은 이야기’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