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가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다시 선이 들어왔다.
이번에도 형부가 주선했다.
“서울에서 밥 좀 먹고 사는 집이고, 총각이야.
직장도 있고, 스물다섯 살이래.”
그 무렵 복이는 벌써 딸을 낳았고,
마을의 처녀들도 모두 시집을 간 뒤였다.
순이가 가장 늦었다.
서울의 예식장에서 순이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다.
맨발에 고무신만 신던 자신이
잠시나마 공주가 된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남자와의 결혼이라는 사실보다
이제 공식적으로 연화리를 떠난다는 생각에 더 기뻤다.
그 기쁨은 첫날밤 끝이 났다.
신랑은 술에 인사불성이 되어 이불에 오줌을 쌌다.
순이는 얼어붙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돌본 조카만 해도 일곱이었다.
열 살이 넘어서까지 이불에 실수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나중에야, 시어머니가 서울에서 이름난 무당라는 것,
굿판을 크게 벌여 현금을 손에 쥐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형부가 말한 “밥 좀 먹고 산다” 는 말은 그런 뜻이었다.
순이는 캐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갈등을 피하고, 주어진 대로 살아내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그 시대의 많은 여자들이 그랬다.
그러나 순이는, 특히 더 그랬고,
그런 성격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무당집에 며느리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굿판에 올라갈 음식은 전부 순이가 만들어야 했다.
어렸을 적, 서낭당 나무 앞에서 봤던 굿판이 떠올랐다.
오방색 저고리를 입은 무당이 펄쩍펄쩍 뛰고,
어른들은 허리를 굽신 거리며 두손을 비비고 있었다.
순이는 상 위의 알록달록한 사탕을 보다
그 옆에 놓인 삶은 돼지머리를 보고는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사탕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돼지머리를 훗날 자신이 직접 삶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피가 다 빠져나간 창백한 돼지머리를
큰 가마솥에 넣고 삶는데, 도무지 얼마나 삶아야 익는지도 몰랐다.
쪄내야 하는 생선과, 무쳐야 하는 나물의 가짓수도 많았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8칸짜리 집에는
점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는데,
손님맞이도 순이의 몫이었다.
큰아이를 임신해 만삭이 될 때까지도 손님이 오면 차를 내어 놓고,
신기 좋게 툇마루 아래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