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미혼이었을 때의 (철없던) 나는
30대가 되면 누구나 안정된 생활을 하고 40대부터는 그저 편안히 즐기며 나이 들어가는 건 줄 알았다.
20대 후반에 친구들 사이에서 결혼 스타트를 끊고 나서야 세상물정을 알게 되었으니 이른 결혼이 나에게 세상을 가르쳐 주었던 셈.
생각해 보면 2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그리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였음에도 그렇게 생각했던 건 그동안의 인생이 순탄했다는 것 아니었을까.
내 인생은 그저 평범했다.
가정주부이신 엄마, 성실한 아빠, 세 살 터울의 동생.
아빠는 매달 월급봉투를 통째로 가져오셨다.
봉투 안에 들어있는 동전을 나와 동생에게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월급날은 나도 동생도 신이 나는 날이었다.
엄마는 알뜰했다.
물 한 방울도 허투루 쓰지 않으셨고 모든 물건은 항상 깨끗하게 사용해서 잘 닦여져 있어 언제나 새것 같았다. 음식솜씨가 좋으셨고 부지런해서 반찬은 물론 간식도 거의 만들어 주셨는데 누룽지를 튀겨 설탕 솔솔 뿌려먹는 누룽지과자, 한가득 만들어서 며칠이나 두고 먹었던 카스텔라뿐 아니라 처음 피자가 나왔을 때 반죽부터 토핑까지 직접 다 만들어주셨던 피자는 너무나 너무나 맛있었다.
집안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항상 말끔했다.
나는 정적인 아이였는데 책을 좋아해서 같은 책을 몇십 번씩 반복해서 보곤 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1등은 아니었지만 전 과목 시험에서 두세 개 틀리는 적도 있었던 성실한 아이였다.
책을 좋아한 덕인지 특히 국어를 잘해서 국어는 고등학교 때까지 전국상위권이었고 영어학원을 다닌 적도 특별히 공부를 하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영어도 잘했다.
아주 잘 살진 않았지만 성실했고 알뜰했던 부모님 덕에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아주 잘하진 않았지만 특별히 학원에 다니지 않고 상위권에서 머무르며 지냈다.
그렇게 자라서 고등학교를 가면서 성적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100프로 문과였던 나는 갑자기 건축과를 가겠다면서 문이과 반배정에서 이과를 선택했는데 부모님은 절대 안된다셨지만 무슨 고집이었는지 이과로 결정을 했고 수 1도 어려운 내가 수 2를 잘했을 리 없었다.
그나마 국어가 받쳐줘서 커버가 되었는데 모의고사에서 거의 항상 만점을 받던 국어가 수능에서는 폭망.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점수를 받고 며칠 내내 방에서 울기만 했다.
정말 웃기는 건 지금까지도 뭔가 마음이 불안하면 시험 보는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 항상 국어를 망쳐서 울거나 내가 공부하지 않은 부분이 시험범위이거나 시험인 줄 몰랐는데 시험이거나 하는 등의 망하는 꿈을 꿔대곤 한다.
수능에서 망친 국어가 이렇게 평생 따라다닐 줄이야..
이것도 일종의 트라우마인 건가..
#결혼 #수능 #20대 #30대 #40대 #인생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