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술 혁명을 이끈 세종대왕

2장에서 100장으로 50배 생산을 늘린 세종대왕

by 김욱

세종 3년 3월 24일 기사는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프로젝트를 직접 챙겼던 세종의 '기술 리더십'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세종은 기존 인쇄 방식이 밀랍을 녹여 활자를 고정시키느라 하루에 고작 두어 장밖에 찍어내지 못하는 비효율을 정확히 파악했다. 이에 당대 최고의 기술 관료들에게 구리판 개량을 직접 명했다. 이는 세종이 국가 핵심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꿰뚫어 보고 그 과정을 직접 관리한 프로젝트 매니저와 같은 면모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종의 리더십은 곧바로 획기적인 성과로 이어졌다. 밀랍 없이도 활자를 고정하는 정교한 조립식 구리판이 개발되면서, 하루 인쇄량이 수십 장에서 백 장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세종이 곧바로 이 기술을 《자치통감강목》 같은 핵심 경전과 역사서 보급에 활용하도록 지시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이 혁신은 곧 '지식의 대중화'를 위한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구리판을 다시 잘 주조한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 주다.(세종 3년 3월 24일 기사)


주자소(鑄字所)에 술 1백 20병을 내려 주었다. 이전에는 책을 찍는데 글자를 구리판[銅板]에 벌여 놓고 황랍(黃蠟)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이를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 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히 지휘하여 공조 참판 이천(李蕆)과 전 소윤 남급(南汲)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더 해정(楷正)하여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 장을 찍어 낼 수 있다. 임금은 그들의 일하는 수고를 생각하여 자주 술과 고기를 내려 주고,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찍어 내라고 명령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그 잘못된 곳을 교정하게 하였는데, 경자년(1420) 겨울부터 임인년(1422) 겨울에 이르러 일을 끝냈다.


구리판을 다시 잘 주조한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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