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명의 비폭력성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한국 사회가 폭력을 경계하는 방식

by 김욱

광화문 광장에 연인원 1,700만 명이 모였던 겨울을 기억한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격한 구호가 쏟아졌지만, 상점 약탈이나 유혈 충돌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세계 언론은 이 풍경을 경이롭게 바라봤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국가 경제가 무너지고 수많은 가장이 거리로 내몰렸을 때도 한국 사회는 폭동 대신 장롱 속 금붙이를 꺼내 들고 성금 접수처 앞에 줄을 섰다. 사회적 폭력과 무질서로 치달을 위기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놀라울 만큼 침착하게 대응했다.


한국인들은 본래 착한 민족일까?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학교와 군대의 가혹 행위, 직장 내 괴롭힘, 온라인 공간에서의 무자비한 집단 린치가 끊이지 않는다. 거대한 거리 시위와 국가적 위기 앞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가, 일상에서는 서로를 상처 입히는 폭력의 장면을 반복한다. 한국 사회 내부에도 분명 억압과 폭력의 에너지는 존재한다.


한국에서 폭력은 ‘정의’의 이름으로 쉽게 포장되지 않는다. 서구 사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물리력을 폭넓게 ‘정당방위’로 인정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싸움이 나면 으레 ‘쌍방 과실’을 먼저 떠올린다. 아무리 억울한 상황이라도 손을 쓰는 순간 피해자의 지위를 잃고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폭력이라는 사건 자체를, 가해자와 피해자를 막론하고 모두의 실패로 보는 시각이 작동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 사회의 비폭력성은 한국인의 도덕성이 유난히 뛰어나서가 아니다.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문턱이 서구와는 다르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무력을 행사해도 좋다”는 명분이 쉽게 작동하는 문명이 아니다. 일단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어떤 명분도 설득력을 잃게 만드는 윤리적 구조 속에 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살게 만들었을까?


신의 정의와 인간의 관계


한국 사회의 비폭력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도덕을 어디에 두고 판단해 왔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서구 기독교-계몽주의 문명은 도덕의 근원을 인간 ‘밖’의 초월적 영역에 두었다. 선(善)과 정의(正義)의 기준은 신의 계시, 보편적 이성, 자연법 같은 것들이다. 이 기준은 인간의 삶 이전에 존재하며, 인간의 행위를 심판하는 절대적 잣대다.


이런 구조에서는 “신의 정의가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사고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이교도’를 향한 십자군 전쟁, ‘악마’를 처단한다는 명분의 이단·마녀 재판, ‘미개’를 교화한다는 식민지 지배의 ‘문명화 사명’까지, 이 모든 폭력은 “절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포장될 수 있다. 결국 서구 문명에서 폭력은 그 자체로 선은 아니지만, ‘더 높은 선’을 이루기 위한 합리적인 수단으로는 정당화될 수는 있다.


이때 도덕적 판단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 된다. 절대적 정의 앞에서 각 개인은 고립된 주체로 신과 대면하고, 개인이 보편적 권리를 가지며, 그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응징하고 책임을 묻는 것 역시 개인의 몫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는 서사는 이렇게 개인을 단위로 사고하는 정의 윤리 속에서 힘을 얻는다. 서구에서 결투가 근대 직전까지 이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상대는 관계적 존재라기보다, 나의 권리를 침해한 하나의 ‘개인’으로 규정된다.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폭력은 더 과감할 수 있다.


반면 유교 문명, 특히 한국의 도덕 상상력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물론 유교에도 천(天)이나 리(理) 같은 궁극적 기준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명령을 어기면 죽이라”고 외치는 인격신의 위협적인 목소리라기보다는, 인간관계와 사회 질서 속에 이미 스며들어 있는 규범과 원리에 가깝다. 서구에서 개인이 절대자와 단독으로 마주 선다면, 유교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관계망 속에서 자리 잡는다. 도덕적 판단이 실제로 벌어지는 무대는 ‘신과 나’ 사이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 즉 ‘관계’다.


부자유친, 군신유의, 붕우유신 같은 오륜의 핵심도 마찬가지다. “누가 더 옳은가?”를 가르는 것보다 “이 관계를 어떻게 파탄 내지 않고 유지할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둔다. 관계는 어느 한쪽이 제거되거나 완전히 패배하는 순간 함께 사라진다. 따라서 상대를 아예 제거해 버리는 치명적 폭력은 단순히 한 개인의 패배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관계망 전체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인식된다.


이러한 관계 중심의 도덕 관점은, 세계를 이해하는 더 큰 틀에서도 서구와 다른 길로 한국 문명을 이끌었다. 그 차이는 곧 세계를 나누는 방식, 특히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성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서구의 이원론, 한국의 음양론


서구 기독교-계몽주의 전통은 세계를 여러 층위에서 이분법으로 갈라 왔다. 신/인간, 영혼/육체, 이성/감성, 그리고 남성/여성. 이 구도에서 앞에 놓인 항은 뒤의 항보다 우월하며, 뒤의 항은 통제되거나 종속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된다. 이성이 감성을, 영혼이 육체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이 구조는 쉽게 ‘배제’로 이어진다. 여성성으로 코드화된 가치들, 예컨대 감성, 돌봄, 의존성, 부드러움 같은 것들은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공적 영역에서 밀려나 사적이고 미숙한 영역으로 밀려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이성, 법, 의지, 정복과 개척을 내세우는 ‘남성적’ 영웅 서사다. 폭력은 이 영웅 서사와 결합하며 정당성을 얻는다. “악을 응징하는 정의의 전사”, “미개를 교화하는 문명의 선봉대” 같은 이미지는, ‘우월한 이성’이 ‘열등한 감성(혹은 야만)’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강화한다.


반면 유교 문명이 채택한 기본 세계관은 음양론이다. 음(陰)은 여성성, 어둠, 부드러움, 감성을 상징하고, 양(陽)은 남성성, 밝음, 단단함, 이성을 상징한다. 여기서 핵심은 음과 양의 관계가 선/악이나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둘은 서로를 전제하며 함께 태극(太極), 즉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는 상보적 관계로 이해된다.


물론 과거 유교 사회가 여성에게 극도로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상징 구조’의 차이다. 유교 문명은 상징의 차원에서 여성성 자체를 악, 타락, 열등성으로 규정해 윤리의 언어에서 완전히 밀어내지는 않았다. 감성(측은지심), 돌봄, 관계에 대한 의존은, 비록 남성 중심 위계 속에 갇혀 있었더라도, 우주의 한 축이자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 상징 구조의 차이는 폭력에 대한 상상력을 갈라놓는다. 서구의 이원론이 폭력을 “우월한 것이 열등한 것을 지배하는 정당한 행위”로 이해하는 경향을 키운다면, 음양론은 폭력을 “한쪽 원리가 다른 한쪽을 압도해 균형(太極)이 무너진 상태”로 보게 만든다. 그래서 “성난 신의 정의를 위해 싹 쓸어버리자”는 상상력보다, “이 판을 깨면 관계가 무너지고 조화가 깨진다”는 두려움이 먼저 작동한다.


‘돌봄의 윤리’와 유교의 공명


이 문명적 차이는 20세기 후반, 서구 윤리학 내부에서 터져 나온 비판과도 연결된다. 1980년대 캐롤 길리건은 로렌스 콜버그로 대표되는 서구 주류 도덕 이론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콜버그의 이론에서 가장 성숙한 도덕 판단은 ‘보편적 정의’와 ‘추상적 원칙’에 근거해 내려진다. 반대로 구체적인 타자와의 ‘관계’, ‘감정’, ‘상호 의존성’을 중시하는 판단은 더 낮고 미성숙한 단계로 분류된다. 흥미롭게도 그의 연구에서 남성들은 전자에, 여성들은 후자에 더 가까운 경향을 보였다.


길리건은 이를 여성의 도덕적 열등함으로 읽지 않았다. 오히려 서구 윤리학 자체가 ‘남성적 정의 윤리’에 편향되어, ‘여성적 돌봄 윤리’의 목소리를 체계적으로 약화시켜 온 결과라고 보았다. 정의 윤리가 “무엇이 옳은 원칙인가?”에서 출발한다면, 돌봄 윤리는 “이 관계를 어떻게 망치지 않고 지킬 것인가?”에서 출발한다. 길리건은 이 ‘돌봄의 목소리’가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라, 정의 윤리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정당한 도덕 합리성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을 받게 된다. 길리건이 서구 내부에서 “억압된 또 하나의 목소리”로 어렵게 복권시키려 했던 그 ‘돌봄 윤리’가, 유교 문명권, 특히 한국에서는 사실상 단 한 번도 주변부에 머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덕을 상상하는 기본 틀, 곧 ‘주류 표준’에 가까웠다.


첫째, 유교 문명에서 인간은 고립된 원자적 개인이 아니라 ‘관계적 자아’다. 도덕 판단은 “내가 어떤 보편적 권리의 주체인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관계(부모/자식, 스승/제자)에 서 있는 누구인가?”에서 출발한다. 둘째, 유교에서 측은지심이나 수오지심 같은 ‘감정’은 이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도덕성을 길러내는 핵심 자원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능력(仁)이 곧 도덕의 출발점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 유교적 관계 윤리가 길리건이 말한 수평적 돌봄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부계·장자를 중심으로 한 ‘위계적 돌봄’이었다. 보호와 돌봄은 지배와 종속의 논리와 결합했고, 여성·아동·하층민은 이 관계 윤리 안에서 자주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폭력의 ‘양상’과 ‘정당화 방식’에 있다. 유교적 관계 윤리가 낳은 폭력은, 서구에서처럼 외부의 타자를 ‘악마’나 ‘이교도’로 규정해 말살하는 외향적 폭력이 아니었다. 주된 폭력은 관계라는 울타리 ‘내부’의 구성원에게, 위계와 질서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내향적 폭력이었다.


이 차이는 폭력에 대한 상상력 자체를 바꿔 놓는다. 유교적·한국적 윤리에서 폭력은 “절대 진리를 실현하는 도구”라기보다, “관계를 붕괴시키는 파국”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 그렇기에 폭력을 행사하는 쪽조차 자신을 “절대 정의의 칼”로 내세우지 못한다. 할 수 있는 말은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식의 고통스러운 자기 변호 정도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는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공권력이 자리를 잡기가 훨씬 더 어렵다.


왜 한국이 특히 비폭력적인가?


인간 중심의 관계 윤리와 음양론적 세계관은 동아시아 문명이 함께 가진 자산이다. 그렇다면 왜 그중에서도 유독 ‘한국’ 사회가 폭력에 더 민감한 사회가 되었을까? 이 지점에는 관계 윤리라는 공통 토대 위에, 오직 한국만이 겪은 특수한 역사적·제도적 경험이 겹쳐 있다.


첫째, 조선은 역사상 가장 철저한 유교 관료 국가였다. “문(文)의 지배, 무(武)의 억제”라는 이상은 500년 동안 나라를 떠받친 핵심 이데올로기였다. 폭력은 어디까지나 국가와 관료가 독점해야 할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졌고, 개인이 사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는 ‘자력 구제’는 야만으로 취급되었다. 서구에는 ‘무장한 시민’의 전통이 있었고, 일본에는 사무라이라는 무사 계급이 존재했지만, 조선에서 개인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은 곧 반역의 징후로 읽혔다. 폭력에 대한 국가의 독점, 사적 폭력에 대한 깊은 불신이 수백 년에 걸쳐 몸에 밴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둘째, 단일한 언어·민족·종교라는 구조적 특수성도 크다. 이 구조에서는 “절대 타자”를 설정해 그를 악마화하고 말살하는 명분을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물론 한국 역사에도 계급·지역·이념의 대립이 빚어낸 참혹한 폭력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폭력조차 ‘완전히 다른 존재’를 향한 정복 전쟁이라기보다, 하나의 관계망 ‘내부에서 생긴 균열’이 폭발한 형태로 나타난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통일신라부터 조선까지의 왕조 교체는 지배 계층의 대대적 교체가 아니라 왕실만의 극히 일부의 교체였다. 새로 들어선 왕조들이 전 왕조의 제사까지 지냈을 정도로 폭력은 극히 일부에 그쳤다.


셋째, 근현대에 겪은 압도적인 국가 폭력의 경험과, 그 역설적인 학습 효과다. 일제 식민지 지배, 한국전쟁의 동족상잔, 그리고 수십 년간 이어진 군사독재. 이 긴 시간 동안 한국 사회의 다수는 폭력을 행사한 쪽이라기보다, 폭력을 당한 쪽에 가까웠다. 1987년 이후의 민주화 체제는 “다시는 국가의 이름으로 그 폭력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집단적 기억 위에서 출발했다. 전쟁, 고문, 학살의 경험은 치명적 폭력과 국가 폭력에 대한 극도로 예민한 감수성으로 바뀌어 갔다.


한국 문명의 비폭력성, 남은 과제


한국 사회의 눈에 띄는 비폭력성은 우연히 얻어진 미덕도, 단순한 국민성의 특징도 아니다. 하나의 문명이 수천 년에 걸쳐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무엇을 두려워할지 결정해 온 결과다.


우리는 도덕의 근원을 초월적 신이나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내재된 인간관계’에서 찾았다. 윤리가 작동하는 방식도 ‘추상적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구체적 감응’(仁과 恕)에 두어 왔다. 세계를 선과 악, 이성과 감성으로 가르는 배제적 이원론 대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음양(陰陽)의 조화로 이해했다. 폭력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관계를 깨뜨리는 파국’으로 상상되었다.


한국은 유교적 관계 윤리를 가장 깊이 내면화한 사회였다. 여기에 ‘문(文)을 세우고 무(武)를 누르는’ 조선의 통치 이념, 그리고 식민지 지배와 전쟁, 독재를 거치며 겪은 압도적 국가 폭력의 경험이 겹쳐졌다. 이 과정 속에서 치명적 폭력은 우리 사회에서 마지막까지 넘지 말아야 할 금기 영역이 되었다.


이것이 한국적 비폭력성의 핵심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마저 의심하고, 인간과 관계의 파탄을 더 두려워하는 문명적 감수성.


이제 남은 과제는 이 비폭력의 자산을 눈에 보이는 물리적 폭력을 넘어, 구조적 폭력과 차별의 문제로까지 확장하는 일이다. 관계와 돌봄의 윤리가 더 이상 위계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아니라, 모든 타자를 향한 폭력 억제의 원리로 작동할 때, 한국의 비폭력성은 비로소 세계사 속에서 또렷한 문명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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