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김영하 『단 한 번의 삶』을 통해 앎의 권력을 성찰하다

by 차미레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은 교사로서 무심코 휘두를 수 있는 ‘앎의 권력’, 즉 ‘나는 안다’고 믿는 순간 생기는 일방적인 해석의 힘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권력은 누군가를 완전히 안다고 착각할 때 생기며,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차단하고 단정 짓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앎의 권력’이란, 타인에 대해 ‘안다고’ 믿는 순간 생겨나는 일방적 해석의 힘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듣기를 멈추고 단정을 시작한다. 교육 현장에서는 이 권력이 ‘교사니까 더 잘 안다’, ‘부모니까 내 아이는 내가 더 잘 안다’는 식으로 작동하며, 때로는 진심 어린 소통 대신 평가와 통제가 앞선다.


우리는 이해를 가장한 단정, 배움으로 빙자한 통제를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성적이 낮은 아이에게 “노력 부족”이라는 단순한 해석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그 아이가 처한 맥락을 간과하고 앎의 권력으로 판단하고 있을지 모른다. 혹은 수업 시간에 자주 산만한 아이에게 ‘주의력 부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역시, 관찰을 해석이 아닌 단정으로 바꾸는 순간, 우리는 오해의 덫에 빠지기 쉽다.

『단 한 번의 삶』은 교사에게 이런 자문을 던지게 만든다.


아이를 둘러싼 또 다른 앎의 장(場)은 가정이다. 하지만 ‘아이를 위한다’는 같은 목적 아래에서도, 교사와 부모가 바라보는 시선은 종종 다르고 충돌하기도 한다.

결국 교사와 부모 모두 ‘아이를 잘 알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행동하지만, 그 ‘앎’은 서로 다른 경험과 기준에 기초한다. 이 차이는 때로 갈등으로, 때로는 서로를 향한 불신으로 번지며, 본질적인 질문 하나로 이어진다.

‘과연 누가, 아이를 더 잘 아는가?’


#교사와 부모, 아이를 아는 방식의 차이

엄마는 자식을 정말로 잘 알았던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
즉 다른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단 한 번의 삶 ‘모른다’ p95 중에서

아이는 학교와 가정에서 각기 다른 얼굴을 가진다.

‘앎의 권력’은 교사와 학생 사이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도 새로운 양상으로 드러난다.

교육 현장에서 교사와 학부모가 갈등을 빚을 때, 그 뿌리에는 종종 이 질문이 숨어 있다.

“누가 아이를 더 잘 아는가?”

부모는 ‘부모로서’, 교사는 ‘교사로서’ 아이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믿음이 곧 ‘앎의 권력’을 둘러싼 경쟁이 되기도 한다.

부모는 아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사랑이 항상 정확한 이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그 사랑이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교사는 하루 평균 6시간 이상 아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관계, 감정, 태도, 변화의 흐름을 경험적으로 축적한다. 이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교육학적 이해와 실천이 결합된 해석 행위다. 이 해석은 단지 ‘봤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서 발달, 사회성, 학습 곤란 등 복합 요인을 고려한 교육적 판단은,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한 ‘관계적 통찰’이자 책무다.

교사와 학부모의 시선은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보완적이어야 한다.

아이를 이해하는 권한은 누가 더 많이 사랑하는지, 누가 더 오래 함께 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부모의 시선과 교사의 시선은 동시에 함께 있어야 아이의 전체를 비로소 볼 수 있다.


#존중 없는 최선이 만들어내는 흔들림


좋은 의도만으로는 아이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교사든 학부모든 모두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나의 최선’이 ‘상대의 경계’를 침범할 때, 교육은 흔들린다.

교사는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의 전인적 성장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불신과 간섭은 교사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위축시킨다. 반대로, 학부모가 아이를 위해 목소리를 낼 때 교사가 무책임하거나 경청하지 않는다면, 신뢰는 쉽게 무너진다.


우리가 놓쳐선 안 될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내가 아이를 위한다고 내딛는 이 행동이, 아이의 세계를 흔들고 있지는 않은가?”

교사의 잦은 교체, 끊임없는 의심과 갈등의 분위기는 아이들을 불안에 빠뜨릴 수 있다.

“왜 우리 선생님, 또 가요?”

“우리 잘못했어요?”

이 질문들 속에는 어른들의 갈등이 만든 결과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수업이나 뛰어난 설명이 아니라, 안정감과 존중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배움에 마음을 연다. 어떤 아이는 칭찬보다도 예측 가능한 하루 일정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어떤 아이는 말없이 옆에 앉아주는 선생님의 존재에서 믿음을 배운다.

안정된 관계와 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한 시작점


진정한 싸움은 ‘협력’을 위한 싸움이어야 한다

교사와 학부모가 각자의 권리만을 주장할 때, 그 틈에서 가장 많이 흔들리는 존재는 아이들이다.

모두 아이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이 아이의 성장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는가?

진정한 싸움은 서로를 공격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더 나은 협력’을 위한 싸움이어야 한다.

그 협력이 가능해지려면, 먼저 우리는 교육에 있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동반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교사는 학부모의 애정을, 학부모는 교사의 전문성을 존중할 때, 교육은 비로소 힘을 얻는다.


# 『단 한 번의 삶』이 남긴 깊은 질문


『단 한 번의 삶』은 철학책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교사가 스스로의 권력을 점검하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우리는 아이의 가능성을 북돋우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나의 앎으로 아이를 조율하려 들고 있는가?

교사라는 위치는 때때로 아이를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권력’에 쉽게 물든다. 아이들은 그 순간 존중받지 못한 채 대상화된다. 『단 한 번의 삶』은 교사로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겸손하게 묻는다.

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항상 ‘완성된 존재’처럼 보이기를 강요받지만, 진정한 교육은 완성된 자가 아닌, 끊임없이 배우고 되돌아보는 자에게서 시작된다. 『단 한 번의 삶』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오늘도 나는 아이를 존중했는가, 아니면 나의 권위를 확인하려 했는가.”

내일도 이 질문을 품고 교실에 들어설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 정직해지는 하루하루가 모여, 결국 아이를 위한 진짜 교육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 내가 아이에게 한 말은, ‘안다고 믿는 말’이었을까, ‘알아가려는 말’이었을까. 이 질문을 교사만의, 혹은 부모만의 성찰로 끝내지 않고, 함께 묻고 이야기 나누는 공동의 질문으로 만들 때, 우리는 교육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아이를 평가하기 전에, 나는 아이의 맥락을 충분히 들여다보았는가?

이런 질문을 함께 던질 수 있는 동료 교사, 학부모가 늘어난다면 우리 교육은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서 ‘함께 알아가는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