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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Jan 27. 2023

일본에 계시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쓰는 편지

엄마에게.

잘 지내?

난 잘 지내.


엄마는 옛날부터 어머니날이나 생일엔 물건이 아니라 편지를 갖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지금까지 거절만 해서 미안해. 편지뿐만 아니라 다른 딸들처럼 어머니날이나 생일을 제대로 챙겨준 적도 없어서 미안해.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날에 수업 참관이 있었을 때도 다 보는 앞에서 엄마에게 편지를 읽어줘야 하는데, 다른 애들이 하는 것처럼 사랑한다거나 낳아줘서 고맙다거나 그런 전형적인 말을 아이 때부터 내가 너무 싫어했어. 부끄러워서 그랬는지 그냥 "일하느라 고생이 많은데 가사노동까지 해줘서 고맙다" 이런 무난한 말을 골라서 전달했던 것 같아.


엄마는 항상 바빴지. 나의 초등학교 시절, 엄마아빠는 둘 다 일하느라 막차 시간이 되어야 집에 들어왔어.


외동딸인 나는 학교를 갔다 오면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에서 혼자 엄마가 준비해 준 음식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데워서 먹었었지.


학교 숙제로 부모님한테 "내 이름의 유래"를 질문해서 그 답변을 받아와야 하는 날엔 저녁에도 회사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로 물어봤었던 기억이 나.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서 힘든 마음에 전화를 안 받는 엄마에게 몇십 번이나 전화를 걸고, 핸드폰도 없었는데 역 앞에서 무작정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던 날들도 있었지.


근데 더 걱정시킬까 봐 왕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을 못 했어. 나중에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사립중학교로 진학해서 나와 잘 맞는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나서 엄마한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왕따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면서 엄마는 나에게 많이 미안하다고 그랬어.


엄마, 지금의 나에겐 옛날이나 지금이나 엄마는 너무나도 완벽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


그 당시에 엄마도 얼마나 나와 함께 있고 싶었을까. 미안해.


당시에 아빠의 사업 상황이 안 좋게 된 바람에 아빠가 집에서도 스트레스가 커서 큰 소리 내고 물건 던지고 그랬을 때도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던 모습도, 냉장고에 있었던 음식까지 던져 벽에 묻은 두부를 아침에 조용히 닦았었던 엄마의 뒷모습도 아직까지 잊혀지지가 않아.


그때 엄마가 나와 목욕을 하면서 던진 "만약에 엄마아빠가 이혼하면 누구한테 따라갈 거야?"라는 엄마의 질문에 "아빠"라고 대답해서 미안해.


엄마도 아빠도 똑같이 사랑했지만 어린 나에게도 엄마는 씩씩해 보이고 아빠는 혼자 못 살 것만 같이 보였던 것 같아. 그래도 엄마 마음을 더 힘들게 해서 미안해.


엄마는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뭐든 에너지를 쏟아줬어.


우리 집에선 아빠가 요리를 담당할 정도로 엄마는 요리를 그렇게 잘하지 않지만, 회사 쉬는 날엔 나와 함께 매주매주 케익이나 빵 같은 디저트를 집에서 자주 만들어 줬었던 기억도, 우동을 반죽부터 만들어가지고 두껍게 잘라진 면을 둘이서 웃으면서 먹었던 기억도,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걸 엄마는 알까? 엄마도 기억할까?


젊을 때 승무원이었던 엄마는 결혼을 계기로 일을 그만두었고 그렇게 경력단절이 된 후에 회사에서 다시 자리를 잡는다는 건 정말로 토가 나올 정도로 힘든 과정이었을 텐데 엄마는 내 앞에서 눈물도 힘들다는 말도 하나 없이 버텨왔다는 것이 이제야 보여.


집에 돈이 없는 시절에도 돈이 없다는 말을 절대 안 하고 하나도 부족함 없이 오히려 과하게 투자해 주면서 나를 키워준 것, 정말로 감사하고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있어요.


나는 지금, 타지에서 사회인이 되어 나 자신을 살게 하는 것도 벅차고 어려운데 거기에다가 아이를 낳고 키우다니 도저히 못할 것 같은 거야. 그걸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때 결심해서 해냈구나. 아주 대단해.


내가 최근 3년 동안 일본으로 못 갔던 게, 한 달에 한번 정도밖에 연락을 못했던 게, 엄마한테 전화 와도 못 받았던 게, 사실은 엄마에게 당당하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어. 대학원 학비까지 내주고 지금까지 좋은 학교 다니게 하느라고 큰 투자를 해줬는데도 나는 돈도 아직 많이 못 벌었고 엄마가 원하는 결혼은 못 할 것 같고 그렇게 원하는 손자의 얼굴도 못 보여줄 것 같단 말이야. 그것도 미안해.   


내가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은 여자고 그 사람과 한국에서 오래오래 살 계획도 하고 있거든.


그땐 몰랐는데 나 엄마랑 닮은 점이 많더라.


요리를 못하는 점, 겉으로는 따뜻해 보이지만 마음은 차가운 점, 참는 걸 잘하는 점, 뭐든 흡수가 빠른 점, 혼자인 시간도 좋아하는 점, 내 사람한테만은 끝없이 잘하는 점, 잠만보인 점.


엄마, 내가 용기가 없어서 아직 편지는 못 줄 것 같아. 사랑한다는 말도 부끄러워서 전달하지 못할 것 같아.


근데 언젠가 둘이서 데이트를 하면서 엄마랑 그동안의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엄마가 해준 것들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


그때까지 부디 잘 지내고 있어요. 나도 다음에 볼 수 있을 때까지 여기서 나답게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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