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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 달라 Mar 05. 2024

P에서 J로

성격의 변화


어릴 적부터 뭔가 계획을 세워 실천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달이 우편으로 오던 문제집은 쌓이기 일쑤였고, 시험이 코앞이어도 친구가 놀러 오면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학의 정석은 1단원 집합 부분만 너덜거렸으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도 잘 정리된 친구의 공책을 복사해서 공부했다. 대학 때까지는 이런 생활 방식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나 하나이니 크게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행동의 패턴은 발령을 받은 후에도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발령 첫해, 옆 반과 다르게 우리 반은 좀처럼 질서가 잡히지 않았다. 아침 자습 시간도 시끄러웠고, 줄을 세우는 것도 힘들었다. 과제를 해오지 않는 아이들도 많았다. 언제나 시끌벅적 우당탕탕.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당시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남편도 그때를 회상하면 놀리기 바쁘다. 내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데, 아이들의 행동은 변하지 않으니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도 꼼꼼하기로 소문난 옆 반 선생님의 요록을 보게 되었다. 하루하루 날짜가 적혀있고 아이들 이름 옆에 동그라미와 세모 표시가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사실 동그라미를 그렇게까지 정성껏 그릴 필요가 있나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학급 운영의 비밀을 그 요록으로 꼽으셨다. 매일 해야 할 일을 정하고 선생님이 정성껏 확인을 하는 과정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교육이었다. 자신의 이름 옆에 예쁜 동그라미가 그려지는 순간도 아이들에게는 큰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학생에 대한 개별지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그 아이들을 변화시키면 학급은 자동으로 돌아간다고 조언해 주셨다.


그동안 요록을 결석생 체크 정도로만 사용하던 나는 선생님의 요록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뚜렷한 원칙 없이 검사를 할 때도 있고 넘어갈 때도 있었다. 완성되지 못한 과제에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이런 나의 일관성 없는 교육 활동에 아이들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애초부터 철저한 계획을 세워 활동 결과까지 의도된 대로 이끌어가는 경험이 별로 없었기에 학급을 운영할 때도 매우 즉흥적이었고 끝까지 끌고 가는 끈기도 부족했다. 일정한 계획 없이 상황에 따라 활동이 변하고, 원칙 없이 행동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은 믿고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혼자만의 실패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학급의 실패가 되어버리는 이런 행동 패턴은 당연히 고쳐야 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니 일관적인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한 번 더 깨닫게 되었다. 부모의 일관적인 태도는 안정적인 애착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며, 행동 결과에 대한 예측 가능성으로 아이는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한다. 교실이 양육을 하는 곳은 아니지만, 교육자의 일관된 생각과 패턴이 아이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평화로운 교실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요즘은 일 년간 혹은 정해진 기간 동안 내가 일관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원칙을 세우고 실행하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공책 사용 원칙을 학기 초 아이들과 함께 의논하여 정한다. 배움 공책, 글쓰기 공책 등 어떤 종류의 공책을 사용할 것인가. 검사는 어떤 주기로 할 것인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다음 단계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 원래의 성향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 결정하게 되면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아이들과 같이 의논하고 원칙을 세운다. 아이들 중에는 나보다 꼼꼼한 친구도 있기 때문에 간혹 내가 우왕좌왕하면 일침을 날려 나를 잡아주기도 한다.


얼마 전 유행했던 성격유형검사에서도 나의 이런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최초의 검사에서는 ESTP의 성향이 나왔으나, 지금은 ESTJ가 우세하다. 다소 즉흥적이고 시행착오를 즐기는 사업가형에서 적절한 질서를 강조하고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엄격한 관리자형이 되었다. 아이들과 MBTI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내 성향을 소개했을 때, 그럴 것 같았다며 호응해 주니 신기했다. 아직도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에서는 즉흥적인 성향이 많이 남아있다. 가던 길을 갑자기 바꾼다거나 신호등이 깜빡이면 뛰어나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교실에서는 여전히 엄격한 관리자가 되어 안정적인 학급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최대한 차분하게,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원칙에 따라 문제를 해결한다. 이렇게 나는 선생님이 되어간다.


© linkedinsalesnavigator,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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