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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 Jun 16. 2023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목이버섯과 함께 떠오른 중국여행


입맛이 없었다. 뭐 먹고 싶냐는 친구의 물음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검색해 보다가 그냥 마라탕집이나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느긋하게 걸어가는데 식당이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향신료 냄새가 났다. 친구도 나도 걸음이 빨라졌다. 식당에 들어서자, 편하신 곳에 앉으시라는 사장님의 한국어와 종업원들의 유창한 중국어가 섞여 들렸다. 우리는 자리에 가방만 재빨리 올려두고 바로 카운터로 걸어가 집게를 들었다. 내가 왼편에 각종 채소류를 담는 동안 친구는 오른편을 맡아 꼬치류와 면류를 열심히 퍼다 날랐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다 친구가 내 쪽을 보며 목이버섯도 넣자고 말했다. 목이버섯을 친구가 좋아했던가 생각하며 나는 조금만 담았다. 목이버섯은 밍밍해서 잡채에 있을 때나 맛있으니까.

무얼 더 담을까 고민하며 집게를 휘휘 젓다가, 이쯤 하자고 눈빛을 교환하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맵기 정도는 늘 그렇듯 ‘신라면 정도의 약간 매운맛’으로 주문했다. 밥 한 그릇까지 시키고 나니, 이로써 주문은 완벽했다. 자리에 앉아 마라탕을 기다리는데 자꾸만 주방으로 시선이 가면서 침이 나왔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 입맛이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하얀 김을 내뿜으며 마라탕이 등장했다. 우리는 대화를 신속히 마무리 짓고 비장하게 수저를 들어 올렸다. 후루룩 소리만 내며 한참을 먹기에 열중하는데, 갑자기 목이버섯을 가리키며 친구가 말했다. 이것만 보면 우리 중국 여행이 생각난다고. 나는 목이버섯을 피해 피시볼을 집다가 놀라서 되물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먹은 그게 목이버섯이었냐고. 어떻게 그걸 잊냐는 친구의 말과 함께 우리는 지난 여행을 찬찬히 복기해 보기 시작했다. 대책 없던 그 여행을. ​


서울로 돌아오기 전, 북경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오늘처럼 마라탕이었다. 공항버스가 멈추는 쇼핑몰 안에 있는 시아부시아부라는 식당이었다. 있지도 않은 시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가성비가 좋아 유학생 시절 한 주에 두 번 이상은 가던 곳이었다. 가게로 들어서니 중국어로 촘촘한 종이를 쥐여줬다. 주문은 여전히 종이에 원하는 재료들을 체크하는 방식이었다. 청경채, 숙주나물, 팽이버섯, 두부… 잘 모르는 간체자들도 신중히 검색해서 주문하곤 부지런히 먹었다. 그러다 아직 공항버스가 오려면 20분이나 남았다는 걸 확인한 후 목이버섯 세 꼬치를 더 시켰다. 아니, 시켰나 보다. 나는 그게 목이버섯이었다는 걸 새까맣게 잊어버렸으니까. 어쨌든 공항버스 비용만 남기고 탈탈 털어 메뉴를 추가한 건 기억이 났다. 후후 불며 먹다가 이제는 진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러 짐을 챙겨 나오는데, 눈앞에서 커다란 버스가 휙 하고 지나가 버렸다. 공항버스였다.​


또 놓칠 순 없었다. 이미 두 차례 일정이 틀어진 후였다. 김포에서 북경을 거친 후 란주에서 삼 일을 보내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이틀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북경에서 란주행 기차를 타지 못했다. 북경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빨리 이동해도 기차출발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북경 시내는 내 기억보다 컸고, 도착한 시점이 차가 막힐 시간이라는 걸 간과했다. 첫 번째 일정 변경은 북경 땅이 어찌나 넓은지 몰라 벌어졌다면, 그다음은 이 북경 땅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예상하지 못해 일어났다. 마침 중국의 가장 큰 명절, 춘절 삼 일 전이었다. 새벽 다섯 시에 도착한 공항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앞으로 가려면 계속 사람들을 밀쳐야 했다. 수속을 밟기 위한 대기 줄 역시 길었다. 졸린 눈을 끔벅이며 두 시간 정도를 서 있었는데, 사람들 틈으로 보이는 화장실 풍경이 변함없었다. 그렇게 선 채로 비행기를 놓쳤다.​


마지막으로 버스를 놓친 이유는 마라탕이, 특히 목이버섯이 이렇게까지 맛있을지 몰랐던 탓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 대책 없는 우리지만 비행기를 꼭 타야 했다. 일단 택시를 잡아보기로 했다. 조수석 창문 틈으로 돈이 없는데 태워줄 수 있냐고 말하자 택시는 쌩 하고 가버렸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서너 대를 보내곤 전략을 변경했다. 일단 몸과 짐을 밀어 넣는 마구잡이 전략. 그렇게 다음 차에 타고 보니, 운전석이 비좁아보일 정도로 덩치가 큰 기사님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오른팔을 가득 채운 문신까지 보고 있자니 잔뜩 쫄아 그냥 내릴까 고민됐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다. 택시비의 1/10도 안 되는 돈을 내밀며 공항으로 가 달라는 말을 들은 기사님은 황당하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더니 이내 시동을 걸었다. 언제든 다시 내릴 태세로 백팩을 메고 있던 우리는 그제야 한숨 돌렸고, 가방을 뒤져 중국 과자를 꺼내서 내밀었을 땐 기사님도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친구와 이 은혜를 어떻게 갚냐고 이야기하다가 문득 속담을 떠올렸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그 속담. 이럴 때 쓰라고 생겨난 말은 전혀 아니겠지만 택시 빚도 갚을 수 있으려나 싶어 우리는 뒷좌석에서 이런 말을 건넸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버시길, 건강하고 안전하시길,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으시길. 오지랖 같았을 말들을 들으며 공항에 도착한 기사님은 돈도 받지 않고, 무시무시한 오른팔을 흔들며 떠났다.

여기까지 회상하고 보니 궁금해졌다. 기사님은 대체 왜 이 뻔뻔한 외국인들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을까. 그리고 뻔하지만 진심이었던 우리의 말은 조금이라도 빚을 갚았을까. 목이버섯은 새까맣게 잊어도 그날 느낀 고마운 마음은 또렷하다. 그렇게 한참 지난 여행을 그리워하고는 빵빵해진 배를 두들기며 식당을 나오는데 친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그날도 분명 입맛이 없다고 해놓고 목이버섯을 그렇게나 맛있게 먹었다고. 다음부턴 우리 고민 없이 바로 마라탕을 먹으러 가자고. 그래, 머쓱하지만 이쯤이면 인정해야 한다. 입맛이 없는 것 같은 날에도 마라탕이라면 한 그릇 뚝딱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나는 목이버섯을 좋아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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