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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Aug 01. 2023

<보 이즈 어프레이드>, 못 일어나는 영화

아리 애스터의 영화적 도술

본 영화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끝나고 못 일어나는 영화가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끝나고 영화관의 풍경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는 순간 아무도 일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유는 추측건대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 당황스럽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엔딩은 일반 관객 입장에서 당황스럽게 끝난다. 갑자기 뜬금없는 장소에서 법정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하면 관객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이해가 안 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관객은 자신이 여태까지 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난해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알려주는 영화라기보단 질문하는 영화이고, 반추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가 난해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기억과 환상, 현실의 경계를 문지르고 혼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철저히 '보'의 시선을 구현하는 데 관점을 두고 있다. 여태까지 우리가 본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철저히 보의 시선이다. 하지만 관객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마지막 장면 10분을 통해 앞의 본 모든 것을 뒤집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결국 관객은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반추해야 한다.



처음 장면을 돌아가 보자. 검은 화면을 시작으로 먹먹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희미한 빨간색 빛이 들어오고 이내 밝은 병원의 풍경이 보인다. 그리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우리가 본 것이 아이의 탄생 과정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 '모나 와서맨'이 얼마나 '보'에 집착하는지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물(양수)'에서 나오며 시작하고, 다시 '물'로 들어가며 끝나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물'은 시종일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물은 일종의 구원의 이미지이면서, 죽음의 상징으로 가변적이고 양가적으로 다가온다. 주인공 '보'의 이름 전체는 '보 와서맨(Beau Wassermann)'인데 여기서 Wasser는 독일어로 '물'이라는 뜻이고 Man이 붙어 '물의 남자'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보의 고향은 와서튼(Wasserten)이라는 가상의 도시인데 이 또한 '물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물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영화를 다시 생각하면 다르게 보이는 측면이 여러 가지가 있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일반적인 영화와 다르게 4막 구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붙어 있다. (보통 할리우드 영화는 3막 구성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로드무비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막을 이동할 때마다 보가 정신을 잃어 화면이 암전 되고 장소가 이동한다. 이는 영화라기보단 문학의 형태에서 가져온 것이고 연극과 비슷하기도 하다. 우선 1막에서 '물'은 구원에 가깝다. 보는 우선 편집증을 앓고 있고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 특징은 이 정신과 약이 물과 함께 먹지 않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자체로 굉장히 코미디의 성격을 가진다.) 보가 사는 도시는 굉장히 환락적이고 위협과 범죄가 도사리는 곳인데, 사실 이는 보의 환상에 가깝다. 정말 끔찍한 범죄가 가득하다기보단, 편집증을 앓고 있는 보가 정신적으로 생각하는 위협이다. (이는 엄마의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순간 보가 실수로 물 없이 약을 먹자, 그 순간 물은 보에게 반드시 필요한 구원이다. 그래서 보는 수많은 위협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으로 모험을 떠난다. 모험이라고 하기 미안할 정도의 거리이지만, 사실 보의 정신적 모험은 이 순간 시작하는 것이다.



2막은 로저와 그레이스의 집에 온 것으로 시작한다. 이 집에서 독특하게 감싸고 있는 것은 시트콤의 감각이다. (이 영화는 각 장마다 고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보는 엄마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자신을 보내달라고 하지만 계속 로저와 그레이스가 막는다. 이는 사실 보의 거짓말이다. 우리는 철저히 보의 시선만을 영화를 통해 보기 때문에 로저 부부가 떠나간 자신의 아들을 대신해서 보가 남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보가 오히려 아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곳에서도 엄마의 감시는 남아 있다. 그레이스가 주주 총회를 가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모나 와서맨의 회사이다. 또한 그레이스가 통화하는 대사에서 "계약과 다르다"라고 하는데, 이는 보를 관리하기 위한 계약이다. 결국 보의 행동과 생각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 인해 로저 부부의 딸 '토니'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결국 페인트를 마시고 만다. 이때 토니는 아들의 방에서 분홍색 페인트로 하늘색 벽에 'BEAU'라고 쓰는데, 이는 보가 아들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전에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봐야 할 장면이 있다. 바로 보가 감시 CCTV를 보는 장면이다. 이때 보는 돌려 감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감기 기능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본다. 또한 그레이스가 토니의 비명을 듣고 달려가는 장면에서 TV를 유심히 살펴보면 마지막 장면의 법정이 나타난다. 영화 초반부에 이런 장면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보가 정신과 상담이 끝나고 길거리를 걸어가는 장면이다. 한 엄마가 아이를 찾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데, 그 아이는 물 위에 떠있는 배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리고 엄마가 아이를 낚아채자 배가 뒤집어지는데, 이는 사실 보의 운명을 관객에게 암시하는 장면이다. (아리 애스터 감독은 이전 작품 <유전>, <미드 소마>에서도 이런 장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보는 사실 자신의 모든 운명을 알고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보는 자신이 앞으로 맞이할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모험을 떠나는 대서사시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마주해야 할 행동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3막은 숲속에서 연극단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그곳에서 보는 자신만의 연극을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때 보의 환상을 펼쳐내는 장면은 연극 연출과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표현하는데 가히 '천의무봉'이라고 할 만한다.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시각적 스타일을 더욱 눈부시게 발전시켜 환상적이고 압도적이다. 그 상상에서 물은 보의 집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물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에 다다르면 무척 슬프게 다가오는데, 왜냐하면 이 상상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는 엄마의 세뇌로 인해 성욕을 통제 당한 존재이다. 보에게 있어 성욕은 탐해서 안되는 욕망이다. 즉 보는 상상 속에서 아들을 3명 가지고 있지만 절대로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숲속에서 '아버지'라고 착각하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 인물을 보고 보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보가 어렸을 때 집에서 일했던 엄마의 하인이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모나에게 큰 빚이 있다"라고 말한다. 즉 그는 부모님의 빚 때문에 모나의 집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보는 반갑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아버지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4막은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밤에 자신이 평생 사랑한 존재 '일레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일레인과 함께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보가 평생의 사랑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레인 입장에선 모나가 없는 회사를 차지하기 위한 계략이기도 하다. 보의 자식을 가질 수 있다면 모나의 거대한 회사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의 'Always Be My Baby'인데, 원곡과 다르게 의미가 여러 가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모나가 살아있다고 등장하면서 모든 진실이 밝혀진다. 보는 자신의 엄마가 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집까지 왔다. 그리고 끝내 아버지의 본모습을 보게 되는데, 무기력한 모습에 끔찍한 환상까지 목격하고 만다. (아리 애스터 영화에서 여성성과 모성은 강력하고, 남성성은 굉장히 무력하다.)



보가 엄마를 밀어버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순간 마침내 보는 내적 성장을 이룩하면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배가 멈추고 일종의 법정 경기장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전복되고 만다. 이때 우리가 영화에서 본 모든 것이 뒤바뀌고 마는 것이다. 보의 거짓말과 진실이 밝혀지면서 사실 그는 악인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리는 영화의 장르가 보의 성장 드라마라고 생각했지만, '피카레스크(악인만이 등장하는 드라마 장르)'였다. 보는 엄마를 향해 살려달라고 외치지만 결국 물에 빠지면서 보는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물'에서 시작해서 다시 '물'로 들어가면서 마무리하는 것인데, 물이 양수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하면 보의 죽음이 안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이 이렇게 양가적인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모성도 이와 비슷하다. 보에게 있어 모성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어머니 모나의 과도한 집착은 보가 편집증을 앓게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보는 모성 없이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결국 보는 엄마를 피하고 싶지만, 필요한 순간 엄마의 도움을 갈구한다. 앞서 말했든 보는 자신의 행동 원리를 밝히려고 하는데, '죄책감'이 바로 보의 행동 원리이다. 중요한 것은 보의 죄책감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심은 죄책감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심어진 죄책감은 보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투영한다.



영화 내내 와킨 피닉스의 얼굴이 등장하는데, 그의 연기력은 정말 놀랍다. 매 장면마다 몸짓과 표정에 실감이 넘친다. 흡입력 있는 그의 연기를 따라가다 마침내 영화가 끝나면, 삶의 굴레에 대한 질문과 동시에 가족이라는 끊을 수 없는 사슬이 떠오른다. 우리 또한 선택한 것이 아닌, 선택되어 태어난 존재라는 점에서 서늘한 무력감도 맴돌고 있다. 지나친 사랑을 받았기에, 오히려 사랑을 갈구하는 역설적인 존재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에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질문으로 가득하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아리 애스터 감독의 야심과 야망이 잔뜩 담긴 작품이다. 야망에 심취하여 자아도취에 빠지는 작품도 간혹 있긴 한데, 아리 애스터 감독은 자신의 재능과 개성을 훌륭하게 발휘하였다. 아마 아리 애스터만큼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이토록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개인적으로 두 번 봐야 이해가 될 만큼 난해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것 같긴 하지만, 영화예술이라면 이 정도의 호연지기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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