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순범 Jul 26. 2023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복싱의 대화

말하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본 영화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후퇴하는 세계 속에서


선천적 청각장애인으로 복서가 된 여성 오가사와라 케이코의 자서전 <지지마!>를 원작으로 한 영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와는 거리가 있다. 스포츠 영화에서 응당 사용하는 핸드헬드 카메라나 긴박한 음악을 이 영화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대부분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하였고 음악 대신 글러브의 타격 소리가 들린다. 이는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그녀의 엄격하고 절제된 삶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복싱 영화의 타격감과 긴장감이 아니다. 우리가 영화 <록키>에서 보았던 뜨거운 스포츠 드라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스포츠 영화치곤 차갑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미야케 쇼 감독의 전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청춘의 위태로운 실존을 담아낸 것처럼, 이 영화도 무너질 것만 같은 감정이 주로 나타나고 있다. 대신 이 영화의 카메라는 케이코와 그녀를 둘러싼 풍경을 고스란히 포착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풍경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 영화에서 풍경 속 열차와 자동차는 계속 움직이지만 케이코는 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다. 공원에서 그녀가 가만히 서있는 장면에서 열차는 그녀의 반대편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후퇴하고 있다. 코로나19가 불어닥치고, 체육관은 문을 닫는다. 그렇게 후퇴하는 세계는 케이코에게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묻는다.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케이코는 복싱으로 답한다. 그녀에게 복싱은 단순히 운동이 아니다. 청각장애인으로서 말할 수 없는 그녀가, 글자나 수어로 대화하는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대화 수단이다. 그녀가 복싱을 연습하는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치밀하게 구축된 글러브의 리듬감과 인물이 움직이는 방향이다. 힙합의 영향을 짙게 받은 듯한 글러브 타격 소리는 그 자체로 독창적인 리듬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복싱은 그녀를 압박하고 밀어붙인다. 복싱을 연습할 때 고정된 프레임에서 케이코는 왼쪽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그녀는 치열하게 반격하고자 다시 오른쪽으로 밀고 들어온다. 복싱은 그녀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아픔과 분노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대화 수단이다.




결국 이 영화는 프레임에서 인물이 움직이는 방향이 가장 중요하다. 고정된 프레임에서 인물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끝내 어디로 나아가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영화의 쇼트가 얼마나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 후퇴하는 세계는 왼쪽을 향해 움직이며 케이코를 압박한다. 케이코는 이에 휩쓸려 가지 않고 계속 저항한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기록하고, 움직이고, 나아간다. 끝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길 위에 선 그녀가 나아가는 방향은 오른쪽이다.


말하지 않는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청각장애인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는 특이하게 관객에게 모든 소리를 들려준다. 오히려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케이코이다. 관객은 영화에 나타나는 모든 대화와 소리를 듣기 때문에 케이코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영화를 본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 내내 케이코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당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후반부에 소리를 활용한 탁월한 장면이 있다. 병원에 누워 있는 체육관 회장에게 아내는 케이코의 일기를 낭독한다. 그 순간 영화는 모든 배경음을 제거하고 그녀의 엄격하게 반복되는 삶을 유려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그녀의 삶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그녀의 모습 속에서 마음을 울리는 파장이 깊게 다가온다. 결국 이 영화의 모든 과정 자체가 '케이코'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처럼 느껴진다.




결국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들리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복싱으로 대화했다.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계속 집중하고 응시했다. 그렇게 후퇴하는 세계 속에 정지한 인물이 끝내 나아갈 때의 기품이 탁월한 영화이다. 어떻게 품위 있는 삶을 만들어 나갈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관객의 눈 또한 들여다본다. 자, 이제 당신은 무엇을 볼 것인가.

작가의 이전글 [월간 영화기록] 6월의 기록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