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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수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요리를

빛과 소리, 그리고 마음까지 담아낸 요리에는 계절이 넘실거리고 있다.

by 권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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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프랑스, 미식가인 '도댕 부팡'과 요리사 '외제니'는 함께 음식을 만들며 접대하는 협업자이다. 그들은 20년간 같이 일했지만, 이렇다 할 사랑의 진전은 없다. 도댕은 끊임없이 구애를 건네지만 외제니는 그저 동료로 남길 바란다. 도댕은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하고, 외제니는 자꾸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신을 잃는다.


그저 요리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트란 안 훙' 감독의 영화 <프렌치 수프>는 분명 요리 영화이다. 이 영화가 시종일관 카메라로 보여주는 것은 군침이 뚝뚝 떨어지는 요리이다. 그러나 요리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정말 요리만을 위한 영화였다면 카메라의 초점은 요리로 향할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초점은 종종 요리가 아닌 인물의 표정을 향한다. 요리를 만들기 위한 그들의 치열한 표정이 카메라에 가득 담긴다. 그렇다면 요리뿐만 아니라 무엇을 더 담고자 했을까.


영화 <프렌치 수프>는 요리 장면에 무척 세심한 노력을 가한다. 재료 준비부터 손질, 가열, 플레이팅까지 전부 묘사한다. 일반인 기준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리 과정도 빼놓지 않고 포착한다. 영화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요리 장면을 율동감 있는 편집과 카메라 앵글을 통해 리드미컬하게 전달한다. 이 과정을 전부 다 보고 느끼는 감정은 2가지다. '식욕'과 '노곤함'. 완성된 요리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식욕이 솟구친다.(공복에 보면 무척 안 좋은 영화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기나긴 요리 과정으로 치열한 부엌을 보았다. 요리 과정을 전부 다 지켜본 관객은 요리사의 노곤함도 느낄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요리의 역사'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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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요리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현란한 기교를 뽐내려는 의도가 아니다. 도댕은 어린 소녀 폴린에게 소스를 맛보고 재료를 알아맞히게 한다. 폴린은 자신의 미각과 기억을 더듬어가며 재료를 추리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소스의 재료와 만드는 과정을 교차 편집한다. 시각과 청각으로 직조된 망상은 영화가 전달할 수 없는 후각까지 자극한다. 소스의 기원을 기록하는 영화는, 한 접시의 소스마저도 수많은 재료와 복잡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영화의 태도와 연결된다. 영화 <프렌치 수프>는 손쉽게 삶과 사랑을 말할 생각이 없다. 성실한 태도로 관찰하며 요리에 담긴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대사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음악도 쓰지 않는다. 피아노 곡조를 통해 운율감을 살릴 수도 있지만, 영화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다. 요리에 담긴 빛과 소리까지 담아내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창문 넘어 들어오는 화사한 햇살을 거부하지 않는다. 빛의 질감을 고스란히 담은 장면은 흡사 렘브란트의 그림 같다. 배경음도 키워 새 지저귀는 소리까지 담는다. 그렇게 영화가 만든 요리에는 단순히 미각만 남지 않는다. 부엌을 비춘 햇살로 시각을, 문틈을 넘은 자연의 소리로 청각까지 담는다. 빛과 소리, 그리고 마음까지 담아낸 요리에는 계절이 넘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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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말 대신 당신에게 요리를


결국 요리한다는 것은 먹는 것을 넘어서 마음까지 담아내는 것이다. 그토록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도댕의 사랑도 그렇다. 로맨틱한 말 한마디로 외제니에게 구애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기는 어렵다. 외제니 또한 자신의 건강 때문에 섣불리 마음을 열기 어렵다. 그래서 도댕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요리를 선물한다. 요리를 선물한다는 것은 음식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 음식을 먹기 위한 격식과 과정, 그리고 분위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선물이다. 선물의 본질은 '시간'이다. 시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이다.


외제니 또한 고맙다는 말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도댕에게 '단 두 번'이라는 말을 건넨다.


"나는 매일 밤 당신이 내 방에 찾아오는 것을 상상했어요. 두 번. 그대로 방문이 열린 순간은 단 두 번이에요."


외제니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나는 널 매일 상상해'라는, 이토록 아름다운 말로 화답한다.

여름의 빛을 담은 사랑은 가을의 바람 따라 결실을 맺는다. 하지만 영화는 결실 대신 낙엽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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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이 깃든 부엌에서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19세기 후반, 외제니는 갑작스럽게 도댕의 곁을 떠난다. 도댕과 약속한 결혼식 대신 장례식이 선행한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 안타깝지만 영화 내내 잠복한 외제니의 죽음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다. 도댕은 쉽사리 마음을 다 잡을 수 없다. 그리고 외제니의 빈자리에 어린 소녀 폴린이 찾아온다. 분명 폴린은 외제니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채울 존재는 아니다. 다만 도댕은 폴린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며 고통의 시간을 견딘다. 폴린에게 요리를 알려주는 부엌은 외제니가 떠올라 괴로운 장소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온전하게 추억할 수 있는 장소도 부엌이다. 그 부엌에서 만든 요리는 고통과 추억을 간직한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과 행복은 병행한다.


도댕은 친구가 가져온 도미 요리에서 다시 봄이 찾아왔다는 것을 느낀다. 도댕은 폴린과 함께 문밖을 나서며 새로운 요리사를 만나러 떠난다.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메라는 천천히 패닝하면서 부엌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 시계태엽을 감는 듯한 카메라는 부엌의 사계절을 담는다. 그리고 도댕과 외제니의 모습에서 카메라는 멈추고 대화를 듣는다. 행복은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것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고 빈도이다. 그리고 외제니는 도댕에게 묻는다. 나는 당신에게 아내인가, 요리사인가. 도댕은 '나의 요리사'라고 답한다. '무엇으로 외제니를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도댕은 요리사라고 답한 셈이다. 결국 그가 사랑한 것은 그녀의 '요리사'라는 정체성이었다. 사계절이 깃든 부엌에서, 외제니는 고맙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이자 마지막 음악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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