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국가부도 사태 속 개인을 그려낸 로드무비 '베킷' 리뷰
넷플릭스 영화 <베킷>은 전형적인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 ‘이오안니나’에서 미국 대사관이 있는 ‘아테네’까지 숨막히는 추격전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괴한의 총성과 함께 베킷은 도망자 신세가 된다. 길을 따라 끊임없이 도망치고, 감독은 그가 도망치는 구간마다 지독한 고난과 시련을 마련한다. 힘겹게 고난을 극복하면 어김없이 또 다른 길이 이어진다. 길과 극복의 반복은 긴장감을 형성하지만, 어느 순간 긴장은 싫증으로 변하고 만다.
우리는 그가 도망치는 이유도, 그를 쫓는 세력의 정체도, 그가 총을 맞아가며 상대에 맞서는 목적도 뚜렷이 알 수 없다.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막연한 불안은 공포를 자극하지만, 무릇 창작자는 독자 또는 관객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창작자가 염두에 둔 세계는 어떤 수용자에게 낯선 정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서사 전반에는 친절하고 은밀한 설명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 점에서 영화 <베킷> 다분히 불친절하다. 그리스의 국가부도 사태로 야기된 국제정세도, 미국의 입장도, 어느 하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배경을 모르는데 어떻게 죽어요?
영화는 그리스 국가부도 사태 이후 급진좌파연합, 시리자(SYRIZA)가 집권한 2015년 전후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5년간 유럽연합(EU)과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총 세 차례의 구제금융을 지원받았다. 트로이카로 불리는 이 채권단 기구들은 그리스에게 강력한 긴축재정을 제안했다. 주된 내용은 공공부문의 인력을 대폭 감축하고 세율을 인상하는 방안이었다. 와닿는 이야기로 덧붙이자면 3만여 명의 공무원이 해임되거나 임금이 삭감됐다. 그동안 트로이카가 지원한 자금은 2,266억 유로(약 280조 원). 그리스 국민 한 명당 약 3,000만 원에 달하는 빚을 진 셈이니 뼈를 깎는 개혁이 불가피해 보였다.
시리자는 트로이카가 강제한 긴축재정이 가혹하다며 강경한 반대운동을 펼쳐왔다. 그리고 채무불이행이 극에 달했던 2015년, 시리자가 집권하면서 정세는 급격하게 뒤바뀌었다. 그들은 경제주권의 회복을 주창하며 긴축재정을 거부하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였다. 영화의 세부 배경은 국민투표를 앞두고 대규모 찬반시위가 벌어진 때로 보인다. 비유하자면 극 중 유력한 정치인 ‘카라스’는 시리자의 수장이고, 베킷을 추격하는 ‘선라이즈’는 강경 우파인 셈이다. 영화는 각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특별한 설명 없이 무책임하게 내세운다.
한편 미국도 급변하는 그리스 정세를 마냥 손 놓고 지켜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문제로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와 중국이 그리스에 자금을 지원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가 달러 패권을 앞세운 미국 중심의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리스 한가운데서 세계 금융질서의 패권 전쟁이 본격화한 것이다. 미국 대사관 직원은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카라스의 아들을 납치한 배후가 좌파연합에서 떨어져 나온 집단의 소행이라는 가짜 뉴스를 퍼뜨려 시리자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 미국은 그리스의 좌파 정당이 눈엣가시다.
영화는 그리스 국토에서 벌어진 이 패권 전쟁의 배경을 좌파정당이 집권하는 자료화면과 대사관 벽면에 걸린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진으로 대체한다. 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베킷의 당혹스러운 표정은 어느새 관객의 얼굴로 전이된다. 관객도 ‘그들이 누구인지’ ‘왜 쫓기고 있는 건지’ ‘무엇 때문에 싸우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무작정 도망치는 베킷을 지켜볼 뿐이다. 미 대사관 직원은 거미줄처럼 얽힌 국제정세를 지루하게 대화로 읊는다. 도식화해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대화로 유추하기란 여간 지난한 일이 아니다.
거대한 국가적 음모 속 무기력한 개인
이야기는 베킷과 그의 연인 에이프릴의 그리스 여행기로 시작한다. 베킷은 졸음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낭떠러지 아래 집으로 곤두박질친다. 아득한 정신에도 한 아이를 발견하고 구조 요청을 한다. 그 아이는 그리스 좌파 진영의 유력한 정치인 카라스의 아들이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베킷은 에이프릴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뭔가에 홀린 듯 사고 현장을 방문한다. 떠나간 연인 에이프릴을 그리워하는 베킷. 그에게 무차별 총격이 가해지고, 그길로 본격 도주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길 위에서 방황하던 베킷은 우연히 카라스의 지지자인 레나와 엘리니를 만나고, 사고 당시 마주쳤던 아이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들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아테네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입성하고,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 아래서 평화를 만끽한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은 그에게 내려진 경보를 해제하기 위해 그리스 경찰에 진술을 해야 한다며 등을 떠민다. 베킷은 석연찮은 마음을 누르고 대사관 직원과 동행한다. 예상대로 직원은 베킷을 공격하고, 도주극이 이어진다. 베킷은 시위대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자신을 공격했던 선라이즈 괴한들을 처단하고 끝내 아이를 구한다.
영화에는 크게 두 단계의 전환점이 있다. 베킷이 구간에 도달할 때마다 안개로 가려져 있던 은밀한 내막은 한 꺼풀씩 벗겨진다. 첫 전환점은 사고 현장에서 벌어진 무차별 총격이다. 금발 여인의 총성과 함께 영화의 장르는 멜로물에서 서스펜스 도주극으로 돌변한다. 두 번째 전환점은 미국 대사관 직원의 배신이다. 그의 입에서 술술 쏟아지는 국제정세에 관한 진술은 꺼져가던 영화의 주제 의식에 그나마 숨을 불어넣는다.
다만 성격을 달리하는 세 개의 서사는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로드무비의 특성상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이어지는 길에서 관객은 한껏 기대감을 높이기 마련이다. 한데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막연한 두려움만 앞선다. 그 길의 끝에 도달하려는 목적의식이 불분명하니 ‘무엇을 위한 여정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르는 것이다. 이 영화는 RPG 게임 시나리오 같은 인상을 준다. 물 흐르듯이 길 속에 서사가 이어지지 않고, 게임이 정한 퀘스트를 수행하는 듯한 전개를 보여 준다.
허무한 전개는 어설픈 수미쌍관으로 끝을 장식한다. 영화 초반부 자동차 씬에서 연인 에이프릴의 대사는 결말과 연결돼 있다. 에이프릴은 불평하는 마음이 생길 때면 “다른 사람을 나라고 생각해”라면서 “그럼 망설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베킷이 줄곧 안고 있던 죄책감이 카라스의 아들에게로 전이된다. 그가 아이를 목숨 걸고 지킨 이유는 에이프릴의 마지막 말 때문이다. 이 어설픈 수미쌍관은 하도 느슨하게 연결돼 혼란만 가중한다. 총까지 맞으며 괴한을 상대하고 끝내 아이를 구출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만 남길 뿐이다.
안개 속 서스펜스가 주는 불안
그런데도 영화 초중반에 깔린 서스펜스의 힘은 굉장했다. 베킷이 길 위를 달리기 시작하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음향이 깔린다. 불필요한 카메라 워크는 최소화한다. 스펙터클을 자제하면서도 묘한 서스펜스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모양새다. 그리스의 자연경관은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장대한 자연과 초라한 인간의 극명한 대비는 아찔하다. 원경으로 촬영해 한껏 아득한 자연 위에 개인을 단지 피사체로서 놔둘 뿐이다. 사방이 노출된 길 위에서 베킷은 마치 한 마리 토끼로 보인다.
외곽을 지나 아테네로 진입하자 살아있는 거리가 나타난다. 영화 속 거리에는 수많은 인물이 각자 색깔을 내며 존재한다. 별 생각 없이 걷는 사람과 벤치에 앉아 쉬는 사람, 그리고 베킷을 응시하는 사람. 거리는 불특정 다수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모든 행인은 나름대로 가면을 쓰고 있고, 위협이 되는 괴한도 선량한 가면을 쓰고 숨어있다. 계단 중턱에서 신발 끈을 고쳐매는 사람은 예상대로 돌변해 칼을 겨눈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있게 마련이지만, 거리가 주는 인물의 애매모호함은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힘이 된다.
그리스어를 전혀 번역하지 않는 것은 영화 내내 궁금증을 자아냈던 독특한 연출이다. 추후 인터뷰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자막을 제외했다고 밝혔다. 낯선 세계에 덩그러니 던져진 이방인의 시선을 관객의 눈에도 이식한 것이다.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감으로 전해지는 느낌. 베킷은 그 사이에서 한껏 움츠러들기도, 작정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베킷이 느끼는 불안을 관객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재치 있는 연출이다.
영화의 초중반부에 몰려있는 도주극은 강렬한 서스펜스의 연속이었다. 장대한 그리스의 자연경관이 내뿜는 분위기와 이역만리 타지에서 느끼는 불안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도주와 함께 깔리는 음향은 노골적이지만 심장을 박동시키기 충분했다. 문제는 초중반 서스펜스가 지나치게 강렬해 후반에 미약하게 폭발하는 액션이 묻히고 말았다는 점이다. 발밑부터 스멀스멀 잠식하는 서스펜스가 노골적인 폭력보다 오히려 파괴적일 수 있음을 감독은 몸소 증명해줬다.
국가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광복절인 8월 15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점령했다. 탈레반은 곧바로 과도정부를 수립했고, 미군에 협조한 이들을 붙잡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카불 히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은 고국을 탈출하기 위해 모여든 시민들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몇몇 시민이 미 C-17 수송기에 매달렸다가 추락하는 아찔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차량 4대에 자산을 나눠 싣고 해외로 도피했다. 얼마 전 벌어진 아프간 전복은 국가의 책임과 의무에 관해 다시금 생각게 하는 사건이다.
국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불행히도 베킷이 만난 대사관 직원은 신뢰 가득한 인상과 딴판으로 국가의 엄숙한 의무를 쉽게 저버렸다. 그리스 우익 단체를 지원하며 세계금융의 패권 전쟁 속에서 외교적 실리를 챙긴 것이다. 그 볼모는 선량한 시민 베킷이었고, 결과는 초라한 개인의 절규에 찬 저항이었다.
90년대 이후 그리스는 무분별한 공무원 증원과 최저임금 대폭 인상, 무상복지 확대 등 포퓰리즘 정책으로 초유의 국가 부도 사태를 초래했다. 실패한 정책으로 피해를 본 이들은 역시 선량한 그리스 국민이었다. 절망 끝에 놓인 베킷을 그리스 국민에 비유했다면 감독이 내세운 주제 의식은 뚜렷하다. 아프간 사태가 발발한 현 상황을 고려하면 시의성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거미줄처럼 엮인 국제정세를 단순한 인물의 비유로 치환하기에 역부족일 뿐이다.
로드무비의 힘: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한 질주
로드무비는 ‘목적지’가 아닌 ‘여정’ 그 자체를 다룬다. 주인공이 지향하는 공간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있는 그대로 관망하는 것이다. 그 여정 사이에는 길을 막고 서있는 반동 인물이 있고,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을 준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노킹 온 헤븐스 도어>나 <델마와 루이스>가 로드무비의 대표적인 예다.
여정 그 자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로드무비는 우리의 삶과도 유사하다. 우리는 삶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그래서 현재는 소중하고, 삶 역시 아름답다. 정해진 미래를 살아가는 것만큼 괴로운 고문도 없을 것이다. 만약 십 대의 소년에게 평생 등대지기의 삶을 쥐어준다면 그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충분히 가슴 뛰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살아간다.
그러나 베킷이 도망가는 길은 막연한 불안만이 가득하다. 기대를 잔뜩 안고 도착한 미국 대사관은 냉정하게 등을 돌렸고, 그에게 남은 길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결국 막다른 길에 가로막힌 베킷은 반동 인물을 모두 파괴한다. 영화는 구출된 아이와 베킷을 교차해 보여주며 다소 억지스러운 영웅서사의 결말로 전개된다. 전 세계 패권의 각축장이 된 그리스의 정세와 국가의 책임이라는 주제 의식은 어느새 흐릿해지고 말았다. 영화를 보며 허무한 웃음이 입안을 맴돈다면 당신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어쩌면 감독이 당신을 미궁 속으로 떠밀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베킷(Beckett, 2021)
감독: 페르디난도 시토 필로마리노
출연: 존 데이비드 워싱턴, 보이드 홀브룩, 알리시아 비칸데르
장르: 액션, 로드무비
국가: 이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