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면 빨리 가고, 둘이 가면 느리게 간다
난 최근 짙고 무거운 공기 속 세상에 살고 있었다.
감기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길어지는 취업 준비로 집-학교(카페)-집을 반복하는 단조로운 패턴에 지치고, 흥이 줄어고 세상이었다.
며칠간 감기 탓 집에서 누워있는 시간이 늘어나,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생겼다.
이따금 느끼는 외로움이 취업을 준비한다는 외로운 싸움을 한다는 자각에서 오는 감정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내 마음에 설렘을 준 사람을 흘려 보냄에서 오는 반작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공기를 마시지만, 사실은 나만의 짙고 무거운 세상 속에 있었다.
9시 반쯤이었나, 어제도 카페에서 공부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ENFP로서 감정에 빠져서 살고 싶은 나지만, 취업 준비를 하다 보니 감정보다는 효율, 이성적인 걸 어느새 더 따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중 가장 빠른 경로를 선택했고, 일직선 500m가 넘는 긴 ~ 길을 걷고 있었다.
퇴근 시간과 학원이 끝나는 시간이 겹치는 오묘한 시간대,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세상을 걷고 있었다.
내 앞에 퇴근하는 여성분은 기분 좋은 봄노래를 들으시는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걷는다. 술 냄새를 풍기며 탈출을 추며 집으로 가시는 아저씨는 아마 지금 이 길거리가 무릉도원 속 무도회장일 것이다. 다양한 세상이 날 지나치고, 내가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던 중, 저 앞에 고등학생 커플들이 보였다.
내가 길에 들어섰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멀리 있었는데, 걷다 보니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의 세상은 꽤 아름다웠다. 하트 모양 흔들의자에 앉아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철길을 따라 걷는 듯한 포즈를 취하기도 하며 길을 걸었다.
반딧불과 은은한 조명이 비춰주는 봄의 한강을 산책하는 분위기랄까.
마치 이 세상에 그 둘만 있는 듯이 천천히, 밤바람을 느끼며 걸어가는 둘의 세상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나와 커플의 거리. 귀여운 고등학생 커플과 내 세상이 잠깐 겹치는 순간, 마치 한강의 물과 흙냄새가 섞인 듯한 공기를 통해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평소엔 10분이면 가는 길인데, 우리 지금 30분 넘게 이 길을 걷고 있어. 어떻게 생각해?"
그 말에 흠칫 놀라 하마터면 발걸음을 멈출 뻔했다.
가까워지는 그들과 나의 거리를 보며 "'혼자 가면 빨리 가고, 둘이 가면 멀리 간다'라는 문장을 주제로 글을 한 번 적어볼까?"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여자 친구는 남자 친구에게 무해하며 귀여운 말을 던지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놀랐고, 그 이후에는 그냥 귀여웠다. 그들의 대화 속 약간의 떨림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렇게 밤 산책을 즐기는 커플의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세상이 내 세상과 공명했다.
그들에게서 느낀 감정은 멜로 드라마에서 느끼는 감정과는 결이 달랐다.
뭐랄까... 조금 더 정제되지 않은 느낌? 내가 느끼는 감정의 밀도가 높았다.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를 통해 분노, 눈물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곤 했었지만, 설레는 감정을 밀도 높게 느끼긴 어려웠다.
아주 꽉 찬 설렘 덩어리를 오랜만에 느껴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잠시 그들의 세상을 구경하곤, 나의 세상을 다시 돌아왔다.
커플의 세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티 나지 않게 조금씩 속도를 올려서 그 둘과 멀어졌다.
커플들의 밤 산책이 더 즐겁고 설렘이 충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타인의 행동과 감정에서 동화되는 감정은 많았지만, 내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진 못했었다. 근데 오늘 느낀 이 설렘은 왠지 내가 느끼는 감정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느낀 외로움은 후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집으로 가던 발걸음을 돌렸다.
효율 말고, 감정에 충실해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모교 앞을 지나며 크게 공원을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공원에서 턱걸이도 몇 개 했다.
옆에서 기다리던 아저씨와 배틀이 붙을 뻔했지만, 내가 이기면 계속하실 것 같아서 예의상 져 드렸다.
핸드폰을 쳐다보지 않고 걸었다. 나만의 생각 의자인 우리 집 옆 그네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많은 걸 비웠고, 정리했다. 깔-끔하게! 이전까지의 내가 쌓아둔 사념과 여러 덩어리를 정리했고, 새로운 무언가를 들여놓을 수 있게 큰 공간을 준비해놨다.
그네에서 내려온 뒤, 공기를 크게 들이마셔 봤다.
전보다는 더 상쾌하고, 맑은 공기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그들의 세계를 보여준 커플들에게 감사했다.
집에 도착하면 선재 업고 튀어 12화를 볼 심산이었으나, 현실 임솔과 류선재를 만나고 난 후라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일 아침 전보다 맑아진 내 세상을 맞이하고 싶어서 일찍 잠에 들었다.
그때 선재 업고 튀어를 본다면 또 다른 설렘을 만날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