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를 통해 엿보는 영원함
조기 축구 창단 기념회를 다녀왔다.
30년 가까이 된 조기 축구팀이라니... 나보다 오래됐다.
'30년 된 조기축구팀은 많지 않습니다. 젊은 친구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30년간 매주 같이 축구하며 인생을 지내왔습니다. 이 관계가 영원하길 기원하며 건배사 하겠습니다...'
이런 축사를 들었다.
영원?
저 아저씨의 영원의 기준은 뭘까?
저 아저씨가 눈을 감을 때, 조기축구가 유지되고 있으면 아저씨는 '우리 조기축구가 영원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겠지?
밤에는 동네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렀다.
여러 사람들의 낙서가 눈에 띄었다.
커플부터 친구들의 우정을 남긴 글, 가게를 응원하는 글 등등. 다양한 낙서가 있었다.
충무로의 단골 술집에 벽면 빼곡히 적혀있는 낙서들도 생각났다.
그중엔 커플들의 낙서도 많았는데, 볼 때마다 '지금도 잘 지내시려나'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래서 나중에 보면 어쩌려고 이런 걸 적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올해 초 알쓸신잡을 모니터링했던 생각이 났다.
알쓸신잡 김영하 박사는 사랑도 자아도 불완전해서 완전하다고 느끼는 것에 바위에 새기는 것이라 했다.
완전하다는 건 영원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순간 유적과 낙서, 완전함 그리고 영원. 흥미로운 단어들이 빠바박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길어 봤자 100년 사는 인생. 그런 우리는 몇 천년 전부터 같은 자리를 지켜온 건물의 흔적, 문화재를 보곤 '영원'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겪지 못한 시간을 겪었고, 앞으로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이 유적은 여기에 있겠지.
나에게 있어서 이 유적은 '영원'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영원하다는 것은 시간에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존재에 가깝다.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영원함'을 꿈꾼다.
죽음이라는 확실함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하니까. 지금 관계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완전함'에 한 발짝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
현실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긴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에 따른 차선책을 만든다.
내가 영원하다고 느끼는 것에 나라는 존재를 남기는 행위로 그 '온전함'에 다가가고 싶음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적에 낙서를 하며 '나(우리의 사랑은)는 이제 유적과 함께야. 영원하자!'
내가 없어도, 우리의 관계는 영원했으면 좋겠으니까.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대'해줄 거니까.
유적의 영원함에 편승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남산 타워에 자물쇠를 거는 것처럼.
원피스의 명대사가 생각났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을 때? 불치병에 걸렸을 때? 맹독 버섯 수프를 마셨을 때? 아니다! 그건 바로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다!"
작가님은 원피스라는 명작을 만들면서 '영원해질' 자격을 얻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 질리는 사람들이 많다.
일상을 기록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인스타그램.
인터넷이라는 '영원한' 존재에 편승하는 아주 쉽고 좋은 방법이다.
그 방법이 너무 쉬워지는 사람들은 '좋은 모습만 영원해라'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좋은 것만 올라오는 '가짜 인생'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도 그 박탈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취업을 하고, 해외여행을 가는 행복해 보이는 지인, 타인의 게시물을 보면서 방구석에 있는 나 자신이 못나 보일 때도 있다.
근데 한 번 생각을 해보자. 좋은 것만 남기는 현상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라 생각한다.
누가 '나 오늘 회사 사수한테 졸라 깨지고 화장실 가서 30분 동안 끅끅대면서 울었다.' 이런 걸 파스테논 신전에 남기고 싶을까.
ㅇㅇ♥ㅁㅁ이런 것만 있지. 혹은 ㅂㅂㅂ개새끼 이런 거 아니면 모를까.
사람들의 영원함에 편승하는 방식이 그런 것뿐. 거기에 현혹될 필요 없다.
그 사람의 인생에 찬란한 순간을 즐겨보자. 위인전의 한 페이지를 읽는 느낌으로.
그리고 바라봐보자. 그 사람이 남기고 싶은 '영원'은 어떤 가치인지.
그리고 생각해 보자. 내가 남기고 싶은 '영원'은 어떤 가치인지.
그렇다면, SNS 속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