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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

by 예P

오늘은 긴 여정을 떠나야 하는 날이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우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다.

정말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어머니는 세월의 무게를 점점 하늘로 올려보내고 계신다.

나날이 휠체어가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내가 미는 휠체어의 무게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내 유모차를 끌면서 어머니가 가져간 내 삶의 무게를 내가 이어받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무거워져도 무겁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무게다.

거울 속 내 모습을 본다. 어느새 나도 검은 머리 대신 흰머리가 내 머리에 가득하다. 이젠 '노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이상한 나이.

흰색과 연한 분홍색의 색조화가 예쁜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어머니를 휠체어 앉히고, 밖을 나선다.

가게 문을 먼저 연 다음, 그 이후 휠체어를 끌고 들어갔다. '무더위 쉼터'. 다니던 은행이 정부에서 지정한 무더위 쉼터에 지정된 것 같다.

휠체어를 빈 공간에 둔 다음, 번호표를 뽑았다. 꽤나 대기 인원이 많다. 항상 바쁜 지점이라 그런 것 같다.

오늘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민생회복 쿠폰 신청. 그리고 어머님이 핸드폰으로 돈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걸 신청하려고 한다.

기다림이 짧지 않았지만, 내부가 시원했기 때문에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 나보다는 우리 어머니 때문에.

드디어 내 종이에 번호가 호번 됐다.

휠체어를 끌고 가 창구 앞에 놓인 의자 옆에다가 모셔두고, 의자에 앉았다.

'오래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업무를 도와드릴까요?'

앳된 표정의 어린 사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아직 얼굴에 주름 하나 없고, 생생한 피부다.

창구의 플라스틱 벽 아래를 보니 '신입행원 백승권입니다'라는 팻말이 보인다.

팻말을 보고 다시 사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와 어머니를 바라보는 사원의 표정에서 뭐랄까,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사원에게 오늘 은행에 온 목적을 말했다. 그 사원은 어머니의 신분증을 요구했다.

오른쪽 아래가 갈라진 어머니의 신분증을 건네줬다. 사진 속 어머님의 사진은 오래된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내 눈에는 어머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신분증을 건네받은 사원은 어머니의 민생회복 쿠폰을 신청해 주고 있다.

이내 신청서 작성을 해야 한다며 종이를 건네줬다. 작성해 돌려주었다.

쿠폰은 금방 신청이 완료되었다. 그다음에 이제 핸드폰에서 이체할 수 있는 그 뭔가 그 그거. 그거 해줄 차례다.

그런데 사원의 표정이 이상하다. 여러 번 어머니의 신분증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한다. 지잉지잉하는 소리가 여러 번 들린다.

꽤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원. 나와 어머니가 처음 왔을 때 지었던 그런 표정이다.

몇 번을 더 신분증을 만지다가, 뒷자리에 가서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돌아온 사원이 말을 건넨다.

"손님, 정말 죄송한데 혹시 신분증을 새로 발급받으신 적 있으실까요? 분실된 신분증이라고 나와서요..."

"어...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거 신청하려고 집에 있는 거 다 찾아보다가 이것밖에 없어서 이거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신분증 사용하실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분실된 신분증으로는 전자금융 서비스를 신청하실 수가 없어서요.... 전자금융 신청하시려면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받으셔야 하십니다."

난감하다. 다시 한번 사원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니가 97세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어머니가 주민센터에 가서 발급받고 다시 오셔서 신청하셔야 하는 건가요? 제가 어머니 신분증 가지고 와서 만들면 안 되는 건가요?"

우리 어머니에겐 오늘 외출도 정말 힘든 걸음인데, 이걸 또 해야 한다니, 너무나 힘든 일일 텐데. 이 사원은 그런 걸 모르는 걸까?

조금은 야속한 마음을 느끼며 사원을 바라봤다.

사원의 눈이 뻘겋게 붉어져있었다. 눈물이 흐르기 직전의 눈이었다.

아,

그가 나를 동정하는 걸까. 동정이라기보다는 공감해 준다고 봐야겠지.

우리의 상황에 공감하면서도 법을 지켜야 하는 그런 상황에 놓인 거겠지.

"네... 정말 죄송합니다." 대답을 하는 사원의 말투에서 조금을 떨림이 느껴졌다.

"네 이해했습니다... 그럼 여기 대출 신청은 다른 창구에서 해야 하는 건가요?"

"대출 신청받으시려면 뒤에 번호표를 다른 걸 뽑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어머니의 휠체어를 끌고 다시 뒤돌아섰다. 기계 앞에서 대출이라고 쓰인 화면을 클릭해 다른 종이를 뽑았다.

다시 뒤돌아 휠체어를 끌고 창구 쪽으로 돌아섰을 때, 내가 상담했던 어린 사원은 자리에 없었다.

휠체어를 끌고 복도를 지나칠 때,

창문에 비친 나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창문 속 은행은 굉장히 바빴다. 매초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촤라라라라락' 돈 세는 소리와 '지이이징' 무언가를 프린트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린다.

여기저기 웅성웅성, 간혹 큰소리도 들리며 정말 바쁘다.

그런 곳에 나와 어머니는 우리만의 시간을 걷는다.

느릿, 느릿.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마치 그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일부로 느린 건 아니다. 세월이 나와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어갈 뿐.

그렇게 나와 어머니는 걸었다.

아직도 하루가 길다. 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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