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밀도 보존의 법칙

엄마와 나

by 더나은

연휴가 되면 가슴을 무겁게 하는 숙제가 있다. 하루, 이틀 동안에 끝내기엔 엄두가 나지 않기에 3일은 내리 쉬어야 비로소 꺼내 드는 숙제다. 시작하기가 어렵고 끝내기는 더 어려운 그 일, 미룰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미루고 싶은 그 일. 오랫동안 묵혀왔던 나의 치부를 마주해야만 하는 그 일.


그것은 바로 냉장고 청소다.


워킹 주부라는 적당한 핑곗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육아휴직을 하던 와중에도 나의 냉장고는 남에게 선뜻 열어 보여주고 싶은 상태가 아니었다.

두부 두 모를 한 모 가격에 구입했던 운수 좋은 날, 한 모만 먹고 냉장고 안에서 완전히 잊힌 나머지 한 모.

'시금치는 싸게 사면 횡재다'싶어 몇 단을 한 번에 사다 놓고는 다듬는 게 귀찮아 일단 냉장고에 보관했었지. 언젠가 시금치 한 단이 8천 원에 육박하여 시금(金)치라 할 때, 우리 집 냉장고의 야채칸에는 허무하리만치 풀이 죽어 썩어가는 시금치 몇 단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흘러넘친 내용물이 뚜껑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소스 통과 유통기한을 확인할 길 없는 슬라이스 치즈가 낱개로 굴러다니는 나의 냉장고. 칸칸 구석에 자리 잡은 반찬통에는 뭐가 들었더라? 친정어머니가 손수 담가 바리바리 싸 보내신 김장김치와 깍두기, 마늘장아찌 따위겠지. 엄마에게는 이미 다 먹고 치워버렸다고,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털어먹었다고 말했던 그것들이 뻔뻔하게도 냉장고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런 냉장고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날이 오건대, 바로 휴일이 붙은 주말, 3일을 내리쉬는 황금연휴다. 일단 마음을 먹으면 일을 벌여야 하기에 냉장고 안에 있는 반찬통이며 소스류, 야채류, 더이상 먹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것들을 모조리 끄집어낸다. 일일이 뚜껑을 열어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판별하는 것이 우선이고 아닌 것은 전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 (엄마, 죄송합니다)

냉장고의 칸막이는 전부 꺼내어 박박 문질러 닦고 말려놓는다. 식초 물에 행주를 적셔서 힘차게 짜낸 다음 냉장고 안도 구석구석 닦아낸다. 간혹 행주만으로 역부족이라 거친 솔질을 해야 할 때는 '어찌 이러고 살았냐'며 스스로에게 악담을 퍼붓고야 만다.


내용물을 비운 수개의 반찬통까지 깨끗이 씻어 부엌 바닥에 엎어 놓으면 비로소 냉장고 청소가 끝난다. 반짝거리는 하얀 냉장고의 텅 빈 공간만큼 마음이 넉넉하다. 온종일 일하고 한숨을 돌릴 겸 괜스레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가 싸준 반찬을 다 못 먹고 버린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일까.



내가 냉장고를 깨끗하게 비우는 동안에 친정엄마도 연휴를 맞아 미뤄뒀던 일들을 하고 계신단다. 나물을 다듬고, 건어물을 손질하고 고기를 저미고, 갖은양념을 버무려서 밑반찬을 몇 가지 만드셨다는데 '온몸이 안 쑤시는 데가 없다'며 너스레를 떠시는 걸 보니 또 반찬으로만 동네잔치를 해도 넉넉한 양인가 보다.

연휴 다음날 택배로 부칠 테니 받자마자 냉장고에 넣어두라 당부하시는 엄마. 텅 빈 냉장고는 하루 만에 이렇게 쉴 틈 없이 채워질 예정이다.

냉장고의 밀도는 엄마의 사랑이라는 관성에 의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법칙이랄까.

먹을 만큼만 보내달라는 말 대신'안 그래도 반찬 다 돼가는데 고마워요!'라며 전화를 끊는다. 다음 연휴 때까지는 정말로 남김없이 먹어치워야지 굳게 결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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