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Jun 06. 2024

꼬마 마르슬랭 까이유

장 자끄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 

  내가 저항하지 못 하고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꼬마’이다. 듣는 꼬마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꼬마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마음 속에 귀여움의 융단이 깔리는 기분이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꼬마 마르슬랭 까이유는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아주 행복한 아이로 지낼 수도 있었다.     


  꼬마 마르슬랭 까이유라니! 꼬마 마르슬랭 까이유라니! 입에 넣는 순간 부드럽게 사라져버리는 달콤한 무언가를 먹은 것 같은 어감이다. 그리고 그 뜻이 빨간색 조약돌이라니, 주머니에 넣고 일하기 싫어질 때마다 만지고 싶은 애착돌멩이로 두고 싶다.     


  이 책을 사랑한지 몇 년이나 됐을까? 20년? 내가 이 책을 선물해준 사람은 몇 명쯤 될까? 10명?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행복한 마음은 지금도 계속 된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지만, 작년에 마지막으로 선물을 준 사람 외에는 누구에게 이 책을 건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들에게 이 선물을 준 것은, 마르슬랭과 르네같은 좋은 친구가 되자, 나의 르네가 되어 줄래, 너의 마르슬랭이 되어줄게 하는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의 표현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그들을 기억하지 못 하는 것은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일까.     


  마르슬랭은 질문한다. ‘왜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까?’ 그것은 꼬마 마르슬랭에게 콤플렉스이며, 자신의 행복을 막는 큰 걸림돌이다. 그런 그에게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은 르네가 나타난다. 그들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그들을 불행하게 하는 재채기와 빨개지는 얼굴. 그것 때문에 그들에게 닥쳐온 수도 없는 사건들. 그것들이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들. 그런데 너의 얼굴 멋진 붉은 색깔이구나. 너의 기침소리가 있어서 난 밤에도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그들은 목요일과 일요일만 되면 숨바꼭질을 하며 노는데, 아앗쵸! 소리를 내는 술래와, 얼굴이 빨개지며 존재감을 숨기는 아이 둘은 하루 종일 숨바꼭질을 한다. 그렇게 존재감이 강한 둘이 하루 종일 술래잡기를 하다니. 그러니까 둘은 그저 같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함께이면 그저 신나는 나날들이다. 그들은 이제 전혀 놀지 않고도, 전혀 말하지 않고도 같이 있을 수 있었다. 가슴에 찰랑찰랑 행복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이 책에서 마르슬랭과 르네는 1등신의 몸매를 뽐낸다. 1등신인 그들이 돌다리를 건너거나, 급하게 걷거나, 게다가 뛰면 그들의 귀여움은 극에 달한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 그들은 그 우연한 만남 이후 다신 만나지 못할까. 아니야, 아니야. 마르슬랭과 르네는 다시 만났다. 왜 난 늘 이런 결론에 행복을 느끼는 걸까. 그들의 우정은 여전히 얼굴이 빨개지고, 아앗쵸! 하면서 계속 된다. 지난 과거 동안 만나지 않은 걸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왜냐면 그 과거 동안 그들의 우정은 멈춘 것이 아니니까. 그들은 어릴 때 놀지 않고도, 말하지 않고도 행복하지 않았는가. 함께 있지 않아도 그들 사이에 우정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이 된 그들이 다시 만나는 장면은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내가 가장 좋아한 장면이었다.      


  이제 훌쩍 큰 그들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입에 미소를 머금고, 같은 자세로, 같은 곳을 보고, 곁에는 그들을 닮은 꼬마들이 뛰어다니고.      


  콤플렉스를 가져서 불행했던 꼬마들은 서로가 있어 행복을 느꼈다. 상대의 콤플렉스를 상대가 가진 매력으로 너그러이 바라봐 주고, 자신의 콤플렉스도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봤을 수도 있다. 이제 어른이 된 그들이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았다는 것도 좋다. 여전히 그들은 얼굴 빨개지는 어른, 재채기하는 어른이다. 그리고 이미 그것은 그들에게 콤플렉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나의 어릴적 콤플렉스를 생각해 본다. 둔한 운동신경, 낯을 가리는 성격. 그 모든 것이 나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르슬랭이 아니었고, 르네가 없었다. 안타깝진 않지만 아쉽기는 하다.     


  머큐로크롬이라는 이름의 약이 있다. 모두 빨간약이라고 불렀던 약. 상처에 바르는 만능약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둔했던 나는 넘어졌고 코 주변이 크게 까졌는데, 엄마가 코에 그 빨간 약을 발라줬다. 그 일로 같은 반 아이들이 얼굴에 케첩을 발랐냐, 고추장을 발랐냐 놀렸던 기억이 난다. 나의 마르슬랭 시절이었으려나. 그때의 쭈뼛대던 슬픔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가 좋아하는 건 꼬마 마르슬랭 까이유라는 말의 어감이 아니라, 마르슬랭 자체인가 보다. 콤플렉스로 인해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고, 또 그 불행에서 헤엄쳐 나오는 마르슬랭을 나는 좋아한다. 꼬마 마르슬랭이 언제나 책장에 꽂혀있다는 건 나에게 늘 잔잔한 기쁨이다. 

작가의 이전글 대접에 받은 대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