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미 Jan 11. 2024

전세사기,  우리 모두에게 집이란?

1. 나에게 집은…


내가 어렸을 때,

내가 살던 그 집엔 비가 오는 날이면.. 어른, 아이, 동네사람들 할 거 없이 모두 빨간 바가지를 들고 물을 퍼 날랐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집은 반지하였다. 큰 도로옆 아주 작은 골목에 이층짜리 벽돌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반지하, 1층, 2층으로 이루어진 작은 주택가였다.

거기서 우린 반지하, 방 두 칸짜리 집에 살았고, 그때는 반지하라는 게 무얼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 점차 위로 올라갈수록 좋은(?) 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 2층 주인집의 사업이 잘 안 돼서 집을 나가야만 했고, 이사 간 집이 마당이 딸린 벽돌 단독주택이었다.

강아지를 키울 수 있었고, 대문 옆 작은 방에는 모르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전세, 월세, 자가 이런 것의 의미를 전혀 몰랐고, 그냥 내가 사는 집은 ‘우리 집‘인가했다.


몇 년 뒤 세 번째 집은 아파트였다.

높은 언덕에 있는 5층짜리 동이 많은 아파트였다.

2층이었고, 방 2 두 개와 화장실이 있었고, 연탄보일러였다. 13평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현관문은 잠그지 않고 다녔고, 누가 사는지 다 알았고, 현관옆에는 연탄보일러실이 있었고, 계단에는 연탄이 쌓여있었다.

어느 날, 부모님은 아침에 나와 내 동생을 깨웠고, 동치미를 먹였다.

후에 그게 연탄가스를 마신 거였고, 죽다 살아난 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고 얼마뒤 부모님은 드디어 집을 샀다면서, 옆동네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방은 세 개였고, 베란다라는 게 있었고,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더 넓고 쾌적했다.


그 집으로 간 후에야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집들은 ‘남의 집’이라는 걸 알았다.


타인의 집에서는 집을 마음대로 수리를 할 수도 없었고, 나가라고 할 때 나가야만 했고, 그래서 많은 이사를 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가 나는 마음속에 불완전한.. 옮겨 다니는 불안함이 문득 도래했고, 유학을 가서도 집에 대해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언젠가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길바닥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사업을 하면서 사무실을 얻을 때도 그 불안감은 마찬가지로 동일했고, 내게 공간은 그렇게 완전(?) 하지 않는 불안감으로 자리 잡았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남편과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예술직업 특성상 불완전했고, 양가 부모님께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신혼집을 알아보러 다니면서 가지고 있는 청약통장으로는 서울, 수도권 지역 임대주택에 20번도 넘게 떨어졌고, 청약도 되지 않았다.  


결혼 한 달 앞두고, 서울 강서 작은 아파트에 반전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보증금 4000만 원 월세 20만 원.

겁도 없었다. 등기부등본도 볼 줄 몰랐다.

그래도 꼼꼼한 부동산 덕분에 이 집이 왜 저렴한지, 등기부등본과 그 외 부당할 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때 당시엔 집이 위험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그저 신혼집을 구했다는 생각과 저렴하다는 생각에 가계약을 했다.

가계약을 한 뒤 바로 그 집을 계약하겠다는 사람이 속출해서 부동산에서 오히려 해지 의사가 있으면 말하라고 할 정도였다.

알고 보니, 집 앞에 1~2분 걸어 나가면 한강이 있었다.

계약하고 나서 보니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라니… 이건 횡재 같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