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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카 Jun 10. 2022

열심히 하는 사람은 눈에 띈다

계약 종료 일주일을 남기고 받은 제안

나는 나 스스로를 '알아서 손해 보는 사람'이라고 평가해 왔다.

눈치껏 밥그릇 챙기는 법을 몰라 할 일을 분담할 때 고된 일을 맡기 일쑤였고, 요령껏 적당히 하는 법을 몰라 같은 일을 해도 남들의 배로 시간이 걸렸다. 어렸을 때는 10만큼 할 수 있으면서 몸 사리느라 5만 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비난했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는 그들이 옳았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 똑똑한 행동을 답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가진 것을 다 쏟아붓는 멍청한 사람이다.


이런 나의 태생적인 한계는 휴학 후 우연한 계기로 입사한 콘텐츠 회사의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여실히 드러났다. 항상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았고, 잠시 일거리가 떨어지면 일회용기로 쓸 종이라도 접도록 했던 이전 알바 사장님의 영향인지, 근무 초반의 나는 쉴 틈 없이 뭐든 빨리 하려고 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우스갯소리로 내게 AI냐고 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에 참여해서 한 주 동안의 이슈를 공유하고 업무 상의 논의를 했다. 일주일 동안 논의할 안건을 미리 메모해 두었고, 회의 시간에는 개인적으로 회의록을 작성했다. 업무 3주차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에 콘텐츠 검수 업무를 진행했다. 어느 날 담당 직원이 검수가 얼마나 진행되었냐고 물었는데, 작품 수가 많아 검수 현황 파악에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컴활 자격증을 준비하며 배웠던 함수들을 활용해서 현황 파악용 엑셀 시트를 만들었고, 이후로 그분은 "얼마나 남았어요?"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고 시트에 접속해 진행도를 확인하셨다.


회사에서의 3개월은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부족한 점을 계속해서 발견해나가는 과정이었다. 특히 업무를 수행하고 직원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에서 업무 태도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웠다. 아래 내용은 당시 퇴근길 버스에서 적은 메모이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회사에 입사한다면 첫 근무 전날에 꼭 이 메모를 읽을 생각이다.


1. 봇이 아닌 동료가 될 것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띡띡 할 거면 편의점 알바를 해라. 내가 이곳, 이 프로젝트의 일원이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현재 회사 사업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가능한 선에서 파악하자. 업무의 이해도가 오를 것이고, 담당자는 나를 일개 알바가 아닌 동료로 인식할 것이다.


2. 온보딩 시 업무의 모호한 점을 질문할 것

업무 지시를 받을 때 업무를 시뮬레이션해 보고, 모호하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찾아 질문하자. 업무 중에 구구절절하게 물어볼 필요 없이 정확한 일처리를 할 수 있게 된다.


3. 10을 시켰으면 12를 하자

스크리닝만 시켰는데 엑셀 시트 아래에 총평을 남기던 OO님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아서 추가함.


4. 업무 커뮤니케이션: 구체적인 보고

“OO 진행 중입니다~”가 아닌, “OO 진행 중인데 ~시간 정도 걸릴 듯합니다.”

상사가 얼마나 걸려요?라고 한번 더 묻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하자


5. 업무 커뮤니케이션: 두괄식 문장 구사

“@OO OO의 프롤로그가 90화로 오기재 되어 있는 것을 에피소드 업로드 직후에 확인했습니다. 구드의 에피소드 폴더명 및 OO시트 에피소드 링크는 올바르게 수정했으나, 관리자 페이지에 잘못된 순서와 OO OO로 에피소드들이 등록되었어요. 저는 권한이 없어서 그런데 혹시 해당 작품 시즌 삭제 부탁드려도 될까요??


입사 4주 차 회사 협업 툴에 작성한 메시지. 너무나도 구구절절하고 마지막에야 요점이 나온다. 퇴근 후 이렇게 바꾸어 보았다.


"@OO 님 혹시 관리자 페이지 내 OO 시즌 삭제 부탁드려도 될까요? 해당 작품 프롤로그가 90화에 가있는걸 에피소드 업로드 직후에 확인해서요. 구드 원고 폴더명 및 OO시트 에피소드 링크는 올바르게 수정했는데, 잘못된 순서의 에피소드가 등록된 시즌을 삭제하고 다시 업로드하려 하는데 삭제 권한이 없어 문의드려요."




어느새 계약 종료일을 일주일 남짓 남겼을 무렵이었다. 가끔 안부를 물으시던 팀장님이 다가와 직원들이 나에 대한 칭찬을 하는 걸 많이 들었다고 말씀하시며, 마케팅 직무를 희망하고 있다면 관련 부서 인턴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해당 직무의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여타 기업이 인턴에게 시키는 수박 겉핥기 식의 업무가 아닌 진짜 기획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시나리오가 더 쓰고 싶었기에 거절했지만, 만약 내가 여전히 마케터를 희망했다면 아주 좋은 경험을 얻을 수 있었던 기회였을 것 같다.


제안에 거듭 감사를 표하는 내게 팀장님은 쿨하게 'OO 씨가 스스로 얻어낸 것이니 고마워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아직까지 나의 가슴 깊숙이 파고든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진다. 누군가는 그깟 인턴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매사에 열의를 다하는 나의 자세는 틀리지 않았고, 같은 일을 하더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눈에 띈다. 그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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