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털의 신화

푸디 워킹맘의 냉장고 탐험기

by 우연의 새

난 요리를 좋아한다.


먹는 것보다 요리를 더 좋아한다.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인터넷이나 해외레시피 등에서 본 특이한 재료를 구입해서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어릴때부터 음식에 관심이 많았다. 책을 좋아했던 아이였는데, 책에서도 음식이 나오는 부분에선 눈을 떼지를 못했고 그부분만 닳도록 읽었다. 지금 40대들한테는 너무도 친숙할, 계몽사 디즈니 전집에 있던 '단추수프' 이야기에서 단추수프를 끓이는 장면, 또다른 동화책에서 보고 궁금했던 호밀빵, 박완서 작가의 어느 책 한구절에 나왔던 민어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던 햄 요리. 펄벅의 '대지'에서 월병이라는 음식이 고소한 돼지비계와 설탕을 버무린 천국의 맛이라는 구절을 읽고서는 월병이라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을까 꿈꿨었다. (그 환상은 몇년전 중국 북경에서 잠시 살게 되면서 무참하게 깨졌다. 기름지고 달콤한 음식은 맞긴 한데, 내 스타일은 아니었음)


(월병 (Moon Cake) 은 식감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만주 (밤만주같은) 비슷하다. 그런데 안의 소는 향신료와 말린 과일, 견과류 등이 다양하게 들어가있다.)


음식과 요리를 좋아해서 성인이 되고 나서 모아온 요리책과 요리도구들이 일반인의 수준을 넘어선다. 특히 요리책은 단순히 레시피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콜렉터 수준으로 사고, 그 책들을 소설 읽듯이 계속 반복해서 읽는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본격적인 워킹맘이 되기 전까진 요리는 나에게 안식처이자 취미였다. 요리를 직접 많이 하진 못했지만 (일이 바빠서) 요리도구와 요리책, 이국적인 요리들을 생각하면서 늘 위안을 받았었다.


그런데.. 두 딸의 엄마가 되면서 요리는 취미를 넘어서 일이 되었다.


어쩌다 재료를 사서 내가 원하는대로 멋지게 요리하면서 쿠킹의 낭만을 즐기는 것보단, 당장 저녁 7시엔 밥상이 차려져야하는 현실. 그것도 내가 음식을 만들어 대령해야하는 명확한 고객이 있고 그들은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요리의 횟수와 양이 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요인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오늘 인터넷에서 본, 먹음직스런 레시피를 위해 매일매일 재료를 사제꼈다가는 거지꼴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쓰레기 처리도 너무 고역)


10년 넘게 워킹맘으로 살면서 요리에 대한 나의 순수한 사랑과 요리를 통해 내가 다해야하는 의무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늘 고민이었다. 취미를 직업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 결국 그것을 잃는다던데.


결론은 아직 답은 없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난 조금씩 조금씩 타협해왔다.


잔머리와 꼼수를 써서 남은 음식과 냉장고에 오래 굴러다니던 재료들로 만들어내는 음식들. 내 머릿속에서 태어나는 음식들이기 때문에 딱히 레시피도 없다. 절박해서 태어나는 음식들이지만 음식과 요리에 대해 내가 나름 쌓아온(!) 내공과 욕심 때문에, 그냥 한번 더 볶고 그냥 한번 더 데워서 먹는 음식들이 아니다. 요 잔반과 조 잔반을 섞고, 이것에 육수를 더해서 국물음식으로 만들어보고, 이 재료와 저 재료를 섞어서 볶아보고.. 마치 테트리스하듯이 냉장고에 끊임없이 쌓이는 것들을 격파해나가는 느낌. 여러가지 블록이 섞여서 알록달록하고 완벽한 테트리스 한줄이 완성되고 그것이 깔끔하게 격파될때처럼, 별볼일없어보이던 재료들과 잔반들이 예상치 못했던 모습으로 태어나고 가족들이 거기에 열광해줄때. 난 요리를 통해 위안받고, 자신감을 얻고, 실질적 효용감까지 느꼈다.


식사노동이 너무 고역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한다. 하지만 안 할 수 없는 노동이어서 나만의 살 길을 찾았다. 내가 원래 요리와 음식을 좋아했다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 것은 맞다.


누가 볼지 모르는 글이지만, 나 스스로를 위해서 이 곳에 워킹맘의 냉털 도전기를 써보려고 한다. 제대로 날잡고 재료 잔뜩 사서 만드는 음식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저녁 6시반에 냉장고 열고 도대체 오늘은 뭘 먹어야하나 고민할 때 만들었던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