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실내 의무화 해제 첫날
오늘 아침 헬스장을 가려하는데 실내 마스크 해제 첫날이라는 뉴스가 들려온다. 이미 실외 마스크 의무화는 사라졌지만 사실 마스크가 찬 공기의 기운과 얼굴을 강타하는 쌀쌀한 겨울 날씨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 실내, 실외를 넘나들며 쓰고 벗기를 반복하는 것이 귀찮기도 하여 쓰고 다니기를 유지했었으나 자율성이 주어진 오늘은 내 판단과 책임을 온전히 존중하며 선택의 고민을 잠시 해 보고, 마스크를 벗고 외출하기를 선택하였다. 마스크 사용에 대해 자율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오늘의 풍경에 대해 기대감을 안고 문밖에 나섰는데 흡연 때문에 마스크를 일시적으로 벗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워낙 공기가 차가웠기 때문에 따뜻하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마스크를 쓰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풍경이었다.
헬스장을 가기 전에 커피를 사려고 카페에 잠시 들렀는데, 근무하시는 분과 커피를 가져가려고 기다리는 손님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때도 나는 계속 마스크를 쓰지 않았지만 마음이 점점 위축되었다. 계속 이렇게 벗고 있어도 되는지, 근무하시는 분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일터에서 오랜 시간 근무하시며 여러 사람을 만나는 저분을 위태롭고 불안하게 하는 건 아닌 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파고들었다. 순간 주머니에 있던 마스크(엘리베이터를 타야 했기에 챙기기도 했지만 없으면 불안한 마음이 들어 챙김)를 다시 쓸까 고민을 했지만,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물리적 거리가 계속 유지된 상태여서 피해를 줄 일은 없겠다 싶은 자율적 선택의 타당성을 존중하며 끝까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커피를 받아 헬스장으로 향하였다. 그전에 헬스장의 풍경에 대한 뉴스 기사 글을 읽었는데, 반반 정도의 비율로 쓴 사라도 있고 벗은 사람도 있다는 기사 내용이었다. 첫날이니 당연히 여러 모습들이 있겠다 싶어 역동적 변화를 맞이하는 마음으로 마스크를 벗고 헬스장에 들어섰는데 나를 뺀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곳에서 근무하시는 분들도 모두 쓰고 계시니 벗는 것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불안하고 소외된 마음, 모든 사람이 나를 의식하는 것 같은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서 사람들 간의 거리가 좁혀지는 운동을 하게 되고 운동하면서 전화 통화를 하게 되는 찰나에 내 안의 양심에 따른 선택이라 여기며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썼고, 이후 불편했던 마음이 다시 안정을 되찾고 편안해짐을 느꼈다.
사실 마스크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얼마 전 프랑스와 스페인을 갔을 때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실내외 마스크 의무가 전면 해제되어 있고, 스페인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규제처럼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때에만 마스크를 쓰도록 하고 있다. 처음 프랑스에 도착해서도 마스크를 한동안 쓰고 다녔는데 마스크를 쓴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서 자연스럽게 벗게 되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으나 그때는 혼자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내 안의 불안과 소외의 마음이 작동시켰다. 동양 사람만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에 대한 풍경이 고립의 정서를 느끼게 하였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 도피>에서 스스로 결단을 내리거나 책임을 지는 것으로부터 도피하는 인간의 모습을 성찰한다. 익명의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것이 자율적 선택보다 덜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 권위가 내면의 양심일지라도 그 양심이 인본주의적 책임이나 사랑, 관심이 아닌 문화나 제도, 도덕적 관습, 종교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은 양심이라면 그 또한 외부적 권위와 다를 바가 없다. 마스크를 써야 하는 이유가 마스크를 썼을 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지도 모르는 피해에 대한 죄책감이 드는 것은 코로나에 걸렸을 때 모든 피해에 대한 죄인이 되어 낙인찍혔던 과거의 기억이 작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기나 독감의 전파력도 강하지만 감기 걸렸을 때 마스크를 일부러 챙겨 쓰며 조심스럽게 행동하진 않았음을 떠올리며 비교해 보니 그렇다. 물론 사회적 책임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이유로 마스크를 쓴다면 같은 행동일지라도 다른 행동이 된다.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선택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쓴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 중 코타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끼던 때에 페스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을 보고 기쁨을 느낀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재앙을 맞이하는 게 이미 불행의 끝에 서 있는 그에게는 하향평준화가 주는 기쁨이었다. 살아 있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을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라고 하는데 개인의 무력감이나 고독감에서 파괴적인 성향이 비롯되고 파괴적인 인간은 외계에 대해서 자신이 느끼는 고독감과 무력감을 외계를 파괴함으로써 벗어나려고 한다. 파괴적인 인간은 살아 움직이는 구조보다는 ‘법과 질서’를, 자발적인 방법보다는 관료적인 방법을, 살아 있는 것보다는 인공적인 것을, 독창적인 것보다는 반복을, 풍부한 것보다는 말쑥하고 깔끔한 것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저장하는 것을 더 좋아하다. 그들은 생명의 자발성을 두려워하며 생명의 약동을 통제하려고 한다.(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p202~204, 박찬국)
코로나가 생명을 빼앗아 가는 치명적 질병일 때는 마스크 쓰는 것이 의무화되는 것이 맞으나 지금처럼 치명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많은 사람이 코로나에 걸려 면역력이 생겼기 때문에 마스크 의무화는 개인의 자율성에 두는 것이 맞다. 그런데 개인의 자율성에 두어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이유가 일단 남의 눈치를 보는 것, 남이 하면 나도 한다는 수동성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걱정이다. 또한 역설적으로 마스크를 쓰면 얼굴을 가릴 수 있어서 내 행동이 더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마스크를 벗지 않기도 한다. 화장을 안 해도, 일부러 미소 짓지 않아도, 인사를 하기 싫은 사람에게 굳이 인사를 하지 않아도 나중에 마스크 핑계를 댈 수 있으니 전염병을 차치하고 마스크를 벗기 싫어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마스크 뒤에 숨어 자유를 찾는 것은 여전히 수동적인 자세이다.
학교에서 마스크를 벗는 것에 대해서도 찬반이 많다. ‘권고’라고 된 것은 주체들의 책임 있는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만약에’라는 가능성을 덧붙여 책임질 일이 없는 안전한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 있는 것은 생명력을 잃게 된다. 살아있고 활력이 넘쳐야 할 교실, 운동장, 도서관, 급식실에는 정체된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얼굴 표정을 알 수 없어서 오해도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어느 순간 마스크에 숨어 아이들은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는 일도 발생한다. 숨고 가려지고 가리며 수동적 존재가 되기도 한다. 마스크를 쓰는 것은 안전하지만 자칫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을 파괴시키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여러 순간 들었었다. 실내 마스크를 벗는 것에 대해 자율성과 인본주의적 책임과 사랑에 의한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기꺼이 환영한다.
#코로나19 #마스크쓰기 #에리히프롬 #자유로부터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