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데 외로웠다

2008년 2월, 그 마음과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by 장시무

전화벨이 울린다. "누구지?"

잠이 오지 않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어.. 안.. 녕.. 하세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잘 다녀오게. 몸 건강하고..." 너무 놀라서 그 뒷말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별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짧은 통화가 끝났다.


버스 밖에서 느껴지는 겨울의 찬 기운이 내 마음보다는 따뜻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쯤 걸려온 전화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내가 오늘 인천공항으로 가는 걸 어머님이 어떻게 아셨지?' 여러 가지 생각이 겹겹이 쌓여서 그만 눈을 감는다. 복잡하다. 다시 기억이 떠오른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창밖의 풍경은 내 마음과 같았다. 모든 벼이삭이 사라져 버린 황량한 논밭, 매섭고 가늘게 늘어진 겨울 하늘 구름. 그리고 차가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들.


'... 그러면, 호주에 잠시 갔다 올래?

정신 차리지 못하는 나를 불쌍히 여긴 선배의 권유로, 이별의 아픔을 비행기에 실어 저 멀리 보내기로 했다.


스탑오버로 들린 도쿄의 아침은 내 마음과 같았다. 시리고 쓸쓸했다. 그때 당시에는 여행책자만 보고 여행 가던 시기다. 소개한 식당은 엄두를 못 내고, 그냥 가다 마주치는 골목식당에 가려 했다.

그런데 웬걸, 아무 데나 들어갔는데 맛집 같았다. 돈가스 집이었다. 카레 돈가스. 그 후로 나는 카레 돈가스를 즐겨 먹는다.

맛있는데, 외로웠다.


도쿄를 배회한다. 시부야도 가보고, 아키하바라, 오차노미즈를 누볐다. 그냥 걸었다. 어딘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발길 닿는 데로 갔다. 그렇게 걸으면 좀 잊히려나...

츠키치마켓이라고 수산 시장에 갔다. 내가 여길 왜 왔지? 생선 비린내와, 죄다 요리거리인데...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사람들이 모인 한 식당을 발견했다. 30분 기다려서 회덮밥을 먹었다. 촬영도 금지된 맛집이었다.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당시 1만 8000원, 미쳤다. 그날 이후로 이전에 먹던 회덮밥은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맛있는데, 외로웠다.


한참을 걷는다. 사진도 찍는다. 도쿄 시내 겉모습은 간판만 일본어고 얼핏 보면 남포동이나 명동과 흡사했다. 새롭지만 익숙한 이 느낌. 심지어 붕어빵도, 약간 고급진 느낌이지만 붕어모양은 비슷했다. 맛있고 비쌌다. 우연히 들른 국밥집 느낌의 라멘집. 인생 라멘을 발견했다. 한국에서는 잘 먹을 일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일본라멘과 사랑에 빠졌다. 언젠가는 일본라멘 먹으러 다시 도쿄로 갈 것이다!

맛있는데, 외로웠다.


여행책자에서 도쿄 시내에 유명한 초밥집을 소개해 주었다. 당시 105엔 초밥식당. 당시 환율로 약 1000원에 한 접시 한 피스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다. 40분 기다려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20분을 더 기다렸다. 이미 배는 고플 데로 고픈상황. 그런데 뭘 시켜야 할지 몰랐다. 옆에 다행히 일본 청년이 앉았다. 계속 '구다사이, 구다사이'를 외친다. 뭔 말이지? 눈치 보니, 구다사이 앞에 한 단어를 더 말한다. '아, 생선 이름이구나! 무슨 생선 달라는 말인가?' 잘 모르지만, 비슷하게 나도 시켰다. 더듬더듬. 그때 깨달았다. '언어는 이렇게 배우는 거구나! 현지인들 하는 거 따라 하면 되는구나.'

몇 접시를 먹었는지 모른다. 주위사람들이 시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기분은 그녀 다음으로 처음이었다.

정말 맛있었는데, 외로웠다.


맛있음과 외로움이 공존할 수 있는가? 그렇다! 삶은 얄궂다. 너무 마음이 힘들고 괴로운데, 외로운데, 눈물 나는데, 처량한데, 맛있다. 사람들은 이럴 땐 입맛이 없다는데 왜 나는 있는 거지? 내가 덜 괴로운가? 벌써 다 잊은 건가? 벌써 그 상처가 아문 건가? 내 생각만큼 큰 대미지가 아니었나?

아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몇일을 집안에 틀어 박혀 있기도 했고, 일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한 선배가 호주에서 잠시 쉬고 오라고, '워킹 홀리데이'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다. 뭔지도 몰랐고, 갈 상황도 아닌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다 내려놓고, 카드 12개월 할부로, 무작정 비행기티켓을 끊은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다.


맛있을수록, 나는 더 외로웠다. 맛있는 것을 먹을수록 함께 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좋은 것을 볼수록 함께 바라본 그 시간이 떠올랐다. 잠깐만, 그래서 그랬던 건가? 그래서 먹고 돌아다녔던 건가?


잊으려 떠났는데, 기억하려 몸부림치다니...


맞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맛있는데 외로웠다. 먹어도, 봐도 떠오르니까.


지금도 그 음식을 먹을 때면, 그때, 그녀와 내가 떠오른다.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준 그녀, 이별의 아픔을 처음 알게 해 준 그녀,

내 인생에 새로운 맛을 알게 해 준 그녀, 꿈에 그려보지도 못했던 그곳으로 나를 인도해 준 그녀.

이후 상상하지 못한 인생길을 처음 열어준 그녀.


지금의 나는 그녀의 이별통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럼 그녀에게 감사해야 하나?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아직도.


맛있어도 외로운 게 인생이다.

잊지 못할 2008년 2월.